"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지난 18일 전격 구속된 박지원씨가 영장실질심사에 들어가기 전 심경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이 말은 조지훈의 시 ‘낙화(落花)’의 첫째 연으로, 박씨는 권력을 잃자마자 영어의 몸이 되는 자신의 처지를 이 시 구절로 대신 표현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기자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그렇다면 ‘꽃’은 ‘자신’과 자신이 누렸던 ‘권력’이요, ‘바람’은 그 화려한 꽃을 지게한 ‘정치의 비정함’을 비유한 것인데 착각도 이쯤 되면 대책이 없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이런 비유로 표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자기 도취로 사는 세상이라지만 그것은 조지훈 시인에 대한 모욕이요, 시에 대한 명예훼손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개그콘서트의 한 장면이었다면 한바탕 웃기라도 하겠다.
그런 이유에서 그를 화제로 삼는 것 자체가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별로 좋지도 않는 얘기를 주저리 늘어놓는 것은 다름 아니다. 그가 재미동포 출신으로 본국 정치무대에서 크게(?) 출세했던 사람이고, 그래서 ‘제2의 박지원’을 꿈꾸는 많은 재미 한인들에게 타산지석을 드리고자 함이다.
그가 재미동포로서 한국에 나가 출세를 했다는 것을 시비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해외에서 자리잡은 많은 한인들이 본국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것은 권장돼야 옳다.
그가 미국에서 가발장사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는 것도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경제적 성공을 꿈꾸지 않는 한인들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할 일이다.
정치적 야망을 불태우던 그가 미국에 유배(?)중이던 DJ에게 크게 경제적 도움을 주는 인연으로 본국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도 넘어가겠다. 한국에서도 정치에 몸을 담으려면 그런 기여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문제는 그가 ‘국민’위해서라기 보다, ‘DJ’를 위해 정치를 했다는 데 있다. DJ는 그에게 있어 ‘주군’이었다. 바꿔 말하면 그는 DJ의 ‘집사’나 다름없었다.
전제군주시절 주군과 집사를 이어준 끈은 맹목적인 충성과 복종이었다. 자신의 의지나 철학은 없이 오직 주군만이 삶의 목표요 전부다. 주군을 위하는 일이라면 부정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박지원씨가 가진 경쟁력은 충성심과 성실성이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DJ집권 5년 내내 그는 오직 그것만으로 지근거리에서 주군을 모실 수 있었다.
그는 나이든 탓으로 체력과 판단력이 크게 떨어진 DJ를 대신해정권 최고의 ‘막후 실세’ 역할을 여한 없이했다.
그가 DJ에게 충성한 것만 가지고는 그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이 난무하는 한국정치 현실하에서 오히려 보기 드문 경우다.
그러나 그 충성의 질이 문제였다. 그는 DJ에게 맹목적으로 충성만 했지 올바르게 보좌를 하지는 못했다. DJ 집권 5년동안 발생한 온갖 권력형 비리의 배후에 그가 거론되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대북 비밀송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그가 DJ를 생각하는 만큼만 국민을 생각했다면 그는 그 일의 불가함을 DJ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올바른 방법으로 정상회담의 성사를 추진했을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방법이 끝까지 덮어질 것으로 판단했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물론 옳은 판단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밀고 나갈 수 없는 제약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당시 영향력을 볼 때 그가 조금만 현명했다면 상황을 이 지경까지는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맹목적인 충성의 결과는 무엇인가. 자신이 모신 대통령은 흙탕물에 빠지고, 자신도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치인이나 공직자의 주군은 ‘국민’이어야 마땅하다. 자신을 정치적으로 끌어주는 보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이다. 오늘날 한국정치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그런 정신을 가진 정치인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말로는 국민을 위한 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정치인은 드물다.
아직도 한국으로 돌아가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자신을 끌어 주는 사람보다 국민을 우선시하는 올바른 정치를 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에게나 국민에게나 불행한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국민들은 지금 조지훈의 시 낙화의 마지막 구절처럼 울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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