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저녁식사로 우리 식구들은 올 들어 처음으로 갓 수확한 옥수수를 쪄서 먹었다. 화요일마다 시내에 서는 농부들의 장날(Farmer’s Market)에 나는 한여름 땡볕아래 열 블록을 걸어가서 사들고 어렵스레 다시 열 블록을 돌아왔지만, 뜨거운 껍질을 벗기고 잔 수염을 걷어내고 황옥같이 영롱한 빛깔의 윤기 자르르 흐르는 찐 옥수수 한입을 먹는 순간 그 고생은 다 잊어버렸다.
김이 아직도 모락모락 나는 햇 옥수수를 단숨에 깡그리 먹어치우며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한 추억에 잠겼다. 그 옛날 어린 시절 (초등)학교 파하고 친구들과 걸어서 집에 가는 길 한 모퉁이에 행상 아줌마들이 솥에 쪄놓은 옥수수를 하나 골라잡고 우저적 먹으며 어슬렁어슬렁 집에 가던 그 시절 - 바로 그때 그 옥수수 맛이었다. 그 시절엔 인생은 그 옥수수 빛깔처럼 영롱하고 달콤했었지...
이런 달콤한 추억을 가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세대인가. 요즈음 세상에 더구나 미국에서 초현대식으로 모자랄 것 없이 자란 우리 아이들 세대가 오히려 불쌍하게 느껴질 때가 이런 때이다. 옛날 가난 때문에 옥수수 먹고 연명했다는 사람들도 있으니 옥수수란 가난한 이의 초라한 만찬이었겠지만 이렇게 잠시나마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도 있는 것은 우리의 추억 때문이리라.
어찌 보면 옛날 시절을 기억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 주는 것 같다. 부모들이 옛날 자기 어렸을 때를 기억한다면 아이들에게 좀 더 따뜻하고 이해성 있으며 자기욕심만 강요하지 않는 친구같은 부모가 될 것이고, 사업에 성공한 부자는 옛날 가난한 시절의 처지를 기억한다면 물욕에 어두워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대신 자선을 베풀지도 모른다. 부부는 더 깊이 화애를 다질 것이고, 나아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막아주려 하지 않을까.
한국에서 줄줄이 들고일어나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의 경제를 쥐어박고 있는 노사분규니 파업대란을 보면서 옛날 가난한 60년 70년대 한국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는 모두 매일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가진 것을 감사히 여기며 지금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더 열심히 일한 것 같다. 도대체 지금 한국이 파업을 일 삼을 때인가. 너 살고 나 살자가 아니고, 너 죽고 나 죽자인가. 어쩐지 우매와 영욕에 눈이 멀어 모두들 가난했던 옛 시절을 너무나 깡그리 잊어버린 바람에 온갖 불행과 화를 자초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나를 괴롭힌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도 개혁인가 뭔가 한답시고 무작정 일방적으로 밀고 나갈 것이 아니라 소시민 시절을 생각한다면 여유를 가지고 문제를 의논하며 다독거려가며 함께 손잡고 하는 개혁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어떤가. 좀 형편이 풀리고 경제기반이 잡히면 발걸음을 좀 늦추고 소박하게 인생을 즐기고 살 수도 있으련만... 한인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끊임없이 들리는 권력다툼의 이야기, 한국인들의 지나친 허세나 욕심, 허영 등은 우리가 이민 올 시절의 꿈 많던 자세와는 너무 먼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소박하고 가난한(?) 농부들과 만나는 일주 장날이 너무나 좋다. 탐스러운 채소를 보면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팔아준다. 아직도 차가운 이른 봄에 밭을 메고 퇴비를 주며 이랑을 세우고 씨를 뿌리던 정성, 한여름 뜨거운 햇볕아래 잡초를 솎아주고 흙이 마르랴 벌레가 먹으랴 아이 키우듯이 정성을 기울여 마침내 거둔 농작물의 기쁨과 신기로움은 키워본 사람만이 알리라...
그 기쁨을 맛보고자 나는 끊임없이 꽃을 가꾸고 채소를 심는다. 농부처럼 흙내음을 맡으며 잠시나마 햇볕에 쪼이며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은 그 어떤 기도보다 순수하고 진실한 심신의 수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위에 여건이 충분히 있음에도 다만 한 송이 꽃을 가꾸고 한 포기 채소를 손수 키워보는 사람들이 흔치 않은 것이 안타깝다.
우리 한국인들 더구나 타향천리 이국에 사는 우리들에겐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가 있다. 고생스럽던 옛날, 한도 많고 설음도 많던 옛날의 기억이다. 그보다 더 소중한 보배는 그 소박했던 날의 소박한 추억들이다. 우리가 즐겨먹던 여름날의 꿀참외니 찐 옥수수, 온 민족이 사랑하던 청초한 꽃 코스모스, 비칠 듯이 고운 순정의 진달래, 높푸른 가을하늘 등등...
이 소박한 추억들을 고이 지니고 사는 한 우리들은 우리는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천신만고 끝에 재생의 기회를 얻은 사람이 한줄기 햇볕을 보면서 새삼 행복을 느끼고 삶을 찬양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지 않은가. 내달도, 내일도 아닌 지금 이 순간에!
가난한 마음속의 풍요... 그런 마음으로 일주일에 한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쯤이라도 우리 모두 가난한 이들의 만찬을 해보면 어떨까. 신선한 삶을, 행복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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