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 지켜온 민족의 얼, 진리와 자유 심어 온 모습, 뒤 안에 우뚝 선 무악 같이, 무겁고 슬기에 영원하여라, 아 아 연세! 연세! 내 사랑아, 형제 자매 내 사랑아.” 이상과 같은 ‘연세 찬가’를 부를 때면 김정숙씨의 마음은 그 옛날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름다운 연세 캠퍼스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젊음을 발산했던 대학 생활은 김씨에게 너무나 값진 것이었다. ‘연세 인이 된 것을 정말 좋아했지요. 무엇보다 백양로와 논지당(여학생회관), 철따라 피는 꽃으로 뒤덮인 연세동산은 나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정신을 가르쳐 준 연세대에 감사합니다. 학문적이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교수님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김씨는 백낙준 총장의 설교, 최재서 교수의 영문학 개론, 오화섭 교수의 희곡 강의, 김형석 교수의 철학 강의가 좋았다고 전했다.
김정숙씨는 서울 깍쟁이로 청구동서 자라 장충 초등학교를 나왔다. 반장에 우등을 도맡아 했으니, 원하는 중학교 어디라도 갈 수 있었으나 아버지께서 난리(전쟁) 통에 여자가 먼 곳에 다니는 것은 위험 하니까 집 가까운 학교에 걸어 다니라고 해서 택한 학교가 무학여중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방송, 웅변, 연극, 문학 서클 등 다방면의 취미를 가졌었다. 연극은 연세대에 진학해서도 계속했다. “대학 때 2번 연극의 주인공을 했습니다. 1학년 때 오화섭 교수 가 연극 안 하려면 학교 그만두라는 강권에 못 이겨 테네시 윌리엄스의 황혼의 산책(Twilight Walk) 여주인공 케이트 역을 맡았었고, 4학년 졸업반 때는 ‘올 섬머 롱’(All Summer Long)의 여주인공 어머니로 출연했지요. 재미있었습니다.” 오화섭 교수의 딸 오혜령, 탈랜트 오현경, 국회의원 유재건씨 등이 함께 연극을 했다고.
평생 영예의 딱지 ‘메이 퀸’
김정숙씨는 당시 특차였던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여 특별활동뿐만 아니라 공부도 뛰어나게 잘했다. 3학년 4학년 때 2번에 걸쳐 수석 장학생으로 뽑혔다.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으니, 제4대 연세대 ‘메이 퀸’의 크라운이 그것이다. “1대 퀸이 영문과 선배인 김희정 언니가 뽑혔어요. 그 선배와 친했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의대와 간호대를 가진 세브란스와 경합이 심했었지요. 1차는 여학생들이 뽑고 2차는 교수들이 학과 성적에 의해서, 마지막 3차는 전교 남학생들이 뽑았습니다.” 그때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리 게시판에 15명의 후보 사진을 붙여 놓았는데, 누군가가 김정숙씨의 사진만을 떼어 갔다. 사진을 가져간 남학생이 누구인지 끝내 몰랐으며 친구들로부터 즐거운 놀림을 당했다고 한다.
유학생으로 피츠버그에
62년 연대를 졸업한 김씨는 63년 9월 6일 피츠버그로 유학을 온다. 그녀는 그곳 드퀘인대학에 입학해서 교육 심리학을 전공했다. 당초 꿈은 공부를 끝내고 돌아가 모교에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사업가 이셨던 아버지는 보수적인 사랑을 베푸신 분으로 저의 유학을 반대했습니다. 엄한 분이셨는데, 멀리 바다 건너 큰딸이 생각나면 텅 빈 2층 내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보고싶은 마음을 달랬다고 합니다. 그런 데도 생전에 6명의 자식이 살고있는 미국을 한번도 오지 않은 고집이 센 분이셨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공부를 많이 한 분도 아닌데, 선이 굵고 진취적인 삶을 사신 분입니다. 제가 어머니한테 많은 것을 배웠지요.” 결혼 한 후 미국서 살아야겠다 는 생각이 들자 전공을 바꾸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당시 뜨기 시작한 도서관학을 공부했다.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1년 만에 MLS(Master Degree of Librarian Science) 학위를 받고, 카네기 도서관에 취직한다. “카네기 도서관은 미국서 질적으로 우수한 도서관입니다. 브랜치가 18개나 되는 큰 도서관이며, 여기서 아이들 담당 부 책임자. 그리고 유태인 촌의 노른자 도서관장으로 20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알바니팍 도서관장으로
개인 사정으로 시카고로 이사를 와서 한인타운에 위치한 알바니팍 도서관장을 3년 동안 한 후, 도서 행정의 넘버2 맨 인 부커미셔너로 승진하는 저력을 보이게된다. 이 도서관에 올 때도 백인 12명과 치열한 경쟁 끝에 실력으로 이들을 누르고 당당히 채용되어 많은 일을 해냈다. 특별히 연방 정부로부터 3만 달러의 기금을 받아 한인 자녀들을 위한 과외 수업 실시는 김씨의 순발력만이 이룰 수 있는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때 한인 교사로는 박난실, 봉종하, 홍경선, 하옥현씨가 수고했다. 그리고 김씨는 미국의 문턱 높은 공립 도서관을 마을문고로 바꾸어 시화전, 사진전, 학예회, 민속공연의 장소로 활용하게 했다. 이에 시카고 공립 도서관협회는 김씨의 소수민족에 대한 공로를 기려 88년 ‘올해의 사서’로 김정숙씨를 선정했다.
38년 간 몰고 온 코리아 ‘여풍’
김씨는 90년부터 현재까지 시카고 부커미셔너로 근무하고 있다. 그녀는 최근 시 공무원으로서 최고 영예인 ‘케시 오스터만’상을 수상했다. 데일리 시장이 직접 시상한 수상식에 참석한 총영사, 한인회장 부부 등 한인들은 한결같이 한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한 김씨를 칭송했다. 본국 신문도 김씨의 사진과 함께 ‘코리아 여풍에 미 들썩’ 이라는 타이틀로 대서특필했다. 김씨는 수상 소감으로 “38년 동안 쏟은 것 헛되지 않아 기쁘다, 이 상은 동료들이 추천해서 받은 사랑의 상이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성실히 최선을 다한 결과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신조는 미소 잃지 않고 자신을 신뢰하면서 이웃과 사회의 도움이 되는 삶을 살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아태 도서협회회장, 백악관 도서협회 회원, 미 도서협회 전국이사로 활동,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한국을 위해서도 공헌했다. 97년 한미 도서인 및 정보교류 컨퍼런스를 주최, 공동의장직을 맡아 개막연설을 했으며, 모교 연세대 총장 및 관계자들을 만나 한국 ‘도서’ 발전에 일조를 했다.
그 날까지 최선 다해 살겠다
기자는 그녀와 인터뷰 시간이 길어져 장소를 식당으로 옮겼다. 아까 집에서는 인생의 꿈, 성취, 영예 등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제 죽음, 패배, 고통, 사랑, 신앙에 대해 한마디 해 달라고 운을 띠었다. “딸한테 투병 배웠습니다.(딸은 잇몸 암으로 고생 후 지금은 거의 다 나았음) 앤아버 미시간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4년 간 매주 1-2번씩 드라이브해서 찾아갔습니다. 내가 건강할 때 딸 간호 한 것 얼마나 다행입니까? 감사하지요. 우리 딸은 5번 수술하고도 벌떡 일어났습니다. 딸을 보면서 하느님이 주신 시련이니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내내 그녀 특유의 미소를 잃지 않더니 어느새 눈가가 촉촉이 젖어든다.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하면서 하루하루 지내고 있습니다.” 시카고의 큰 동량 김정숙씨가 ‘어서 벌떡 일어나’ 더 큰일을 하기를 기원하면서 그녀와 헤어졌다.
<육길원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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