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낙하(落下)의 계절이다. 열매도 나뭇잎도 모두 말없이 대지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영어의 ‘폴’(Fall)은 낙하의 뜻이기도 하고 가을의 뜻이기도 하다. 가을은 향수(鄕愁)의 계절이다. 그래서 향수의 수(愁)자는 마음 심(心) 위에 가을 추(秋)자를 실었다. 그리고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다. 천자문에서 가을 추(秋) 거둘 수(收)하듯이 오곡(五穀)과 백과(百果)가 풍성한 계절이다.
입추(立秋)는 지났지만 본격적인 가을은 추석(秋夕) 전후부터 시작된다. 추석이란 가을 저녁이란 뜻이지만 추석 저녁에 중천을 향해 떠오르는 ‘달마중’을 잊지말자는 뜻이기도 하다.
달은 보는 사람 누구에게나 뜬다. 안 보겠다고 등을 돌려도 등에 업혀 따라 온다. 「…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하듯이 어느 한 곳에만 뜨는 것이 아니다. 서문밖 사람은 남산에 떴다고 하지만 태평양 바다 위에도 뜨고 스모키 마운틴 위에도 뜬다.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경포대 호수에는 『하늘의 달, 호수에 비친 달, 잔잔한 파도에 비친 달, 술잔 속에 비친 달 그리고 벗의 눈동자에 든 달』이렇게 다섯 개의 달이 뜬다고 율곡 이이(李珥)가 열 살 때 시흥(詩興)이 솟꾸처 경포대부(鏡浦臺賦)에서 읊었다.
박 넝쿨로 덮인 초가집 지붕 위로 떠오르는 달은 또 어떠한가. 모깃불 놓고 숫다림질하는 정경까지 합치면 다섯 개의 달을 합친 그 이상의 감취가 있을 것이다.
‘미국 하늘에도 추석 달은 뜰까?’ 물론 떠오른다. 그러나 추석 달을 못보고 잠든 사람에겐 추석 달은 떠오르지 않는다. 우문우답에 가깝지만 어찌 보면 우문우답이 아닐 수 있다.
일그러진 초가집 창문 앞 툇마루에 어린것들이 옹기종기 앉아 회뿌연 구름을 헤쳐 가는 달을 향해 부르던 노래가 있다.「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 초가 삼간 집을 지어 양친 부모 모셔다가 /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달에 새겨진 압축된 효의 한 서약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연을 만들어 날리는 일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상대방의 연과 공중에서 곡예(曲藝)를 부리다가 서로 따먹기 시합을 하게되면 얼레에 실을 감았다 풀고 풀고 감는 묘기와 때에 따라 얼레를 튀기는 묘기로 상대방의 실을 짜른다. 하늘 높이서 바람을 타고 두둥실 떠내려오는 연을 따라 들판을 뛰던 생각이 간절하다.
96 아틀란타 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주경기장 상공에 한국의 방패연(防牌鳶) 하나가 행사 내내 창공을 비행하며 허공무(虛空舞)를 펼친 장관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 연을 만든 주인공은 뉴저지에 거주하는 유재흠(80) 옹으로 유옹을 아는 미국인들은 그를 ‘연의 사나이’(The Kite Man)라고 부른다. 강원도에서 오랫동안 농장을 경영하다가 미국에 온 이 할아버지는 한국을 알리는 일을 하고 싶어 자신의 특기인 ‘연’을 가지고 하늘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추석 송편도 그렇다. 말 그대로 싱싱한 솔잎을 이웃 야산에 가서 따다가 층과 층 사이에 깔고 재래식 시루에 찌는 것이 제 식이다. 송풍(松風)이 몸에 좋듯이 송액(松液)이 송편에 베고 송편에 솔잎 자국이 나야 송편이다. 중국의 월병(月餠)보다 얼마나 건강의 지혜가 담긴 송편인가. 염색도 쑥을 삶아 맷돌에 갈아 썼지 물깜은 쓰지 않았다.
벌써 여러 해가 지났지만 은제(銀製)로 만든 거울 뒷면에 우리 한국인에게 다정한 계수나무와 달에서 절구질하는 토끼 그림이 새겨진 보물이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되었다. 이 환상적인 달의 정서를 거울의 장식으로 새긴 것은 첫째로 달은 음기(陰氣)의 원천이며, 둘째 여자는 음성 체질이며, 셋째 거울은 여자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으로 당시 학계는 논평했다.
날을 받아 논 예비 신부가 유모나 이모로부터 은밀한 성교육을 받고도 가장 알고 싶긴 하지만 감히 물어 볼 수 없는 쑥스러운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철모르는 남편에게 어떻게 구애의 사인을 하느냐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오늘밤 유난히 달이 밝습니다라고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말 조차도 쑥스러워 못할 경우가 허다해 눈치챈 남편은 “오늘밤 연꽃이 피려나? 이렇게 먼저 운(韻)을 텄다고 한다. 등잔불을 끄고 이어서 나온 달에 대한 속 얘기는 “달아, 밝은 달아! 수놓은 베개를 엿보지 말아다오였다니 희안한 달의 침실문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같은 달의 신비도 우주 과학에 의해 하나 하나 벗겨지고 있다. 아폴포 우주인들의 달 탐사가 그렇고, 그들이 남긴 발자국을 코비 망원경이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렇고, 혜성을 발견한 미국의 천체지질학자 유진 슈메이커(1938-1997)의 유해가 달에 묻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달의 신비가 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달은 아직도 베토벤의 월광곡 속에 있고, 달은 아직도 우리들 향수 속에 있다. “미국의 하늘에도 추석 달은 뜬다(9/11). 우선 추석 전야(9/10)의 달을 보며 가족끼리 오순도순 송편을 빚어보는 것도 좋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아직 차지 못한 달을 보는 것도 뜻이 있고, 한국에 뜬 추석 달과 시차의 차도 좁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난히 밝기도 하지만 크게 보이는 추석 달이 회뿌연 구름을 헤쳐 가는 모습이 마치 우리의 삶의 역정과도 같지 않은가.
/ikhchang@aol.com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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