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민/ KAWAWA 회장>
나의 삶속에 죽음이 있다면 나의 죽음 속에서 생성되어야 할 삶은 과연 어디서 어떤식으로 어떤 주변 환경속에서 형성되는가? 나의 숨결은 산소와 탄소외에 어떤 종류의 기류들이 내 존재의 문턱을 들락날락하는가? 콜마에 있는 사이프러스 묘지에 도라 김은 묻혔다. 내가 도라 김을 처음 본 것은 미국에 갓 이민와서 구직에 바쁘던중 어느 분이 귀뜸을 해주어 그 분이 일하시던 EDD를 무조건 찾아갔을때였다. 그때 그녀가 보여준 직업 리스트는 모두 나의 기술이나 영어실력으로는 전혀 엄두도 못낼 그런 좋은 직업들이었다. 간호원, 비서직, 캐쉬어, 등등. 실망하는 내게 도라는, 용기를 잃지말고 무엇보다도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조언을했다. 그말을 들으러 도라를 찾아간것은 아니었는데…
영어공부, 내가 왜 영어를 해야되나. 영어 못해도 미국에 와보니 다들 잘 사는 것 같던데-. 몇 주 동안을 지독한 자신감 상실증에 걸려 밤에 잠을 설치는 날이 잦아졌다. 한참을 그렇게 헤메이다가, 영어공부를 하던가 죽든가 둘 중에 하나다로 결론이났다. 그러나 억울하기가 짝이 없는 심정이었다. 그것은 마치, 영어공부를 하는 일이, 생각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들이 닥친 억지 결혼 권유에 얼굴도 못본 남편과 결혼식을 올리곤 외롭게, 낙동강의 오리알도 못 되는 신세가 되어 아프리카의 어느 이름도 발음하기 힘든 나라의 강변에서 죽도록 고생하며 이유없이 갇혀 사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어느 면으로보나 탈출의 길은 보이지 않았고 강간내지는 겁탈을 당하는 기분이 이럴까? 죽을 맛이 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고-. 당할 때 당한다치자. 그렇다면, 그 환경속에서 무엇을 얼만큼 선택할수있는가?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 내가 할수있는일은 무엇이며 어떤식으로 전개될 수있는가? 선택의 길은 행동이 뒤따랐다. 나는 선택의 값을 따지는 일은 하지않기로 했다.
내가 다시 도라를 보게된것은 한 삼년후 한인봉사회관에서였다. 대학시절, 영어를 얼만큼 할줄 알게되자 더욱 답답해졌기에 쓰라린 속을 달래려 봉사회관을 찾았다가 자원봉사자가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도라를 조금씩 더 알게 되고 그녀의 5세대의 가족관계와 재미한인역사도 알게 되었다. 도라와 적지않은 시간을 한인봉사회관에서 보내며 나는 억압과 속박, 그리고 제한 속에서 내 나름대로 해방되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배웠는데 이것은 여러모로 내게 큰 힘의 원동력이 되었다. 여자로써 제한된 상황속에서 자아를 상실하지 않고 남에게 상처주지 않으며 성장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지만 그리 어려운일도 아니라는것을 나는 도라에게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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