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일본에도 우리나라에서처럼 고려장이라는 것이 있었다는데 몇 년 전 굴참나무 산(나라야마)이라는 제목으로 책과 영화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일본의 한 산골 오지, 먹고 살 것이 넉넉하지 못한 생활 속에서 늙은 부모들이 양식만 축낸다고 부모를 굴참나무 산에 갖다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린 할머니는 자기가 그곳에 갈 나이가 되어가는데도 이빨이 너무 멀쩡해서 돌절구에 이빨을 부러뜨리고, 아직 곧은 허리를 일부러 구부려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또 멀쩡한 정신인데도 거짓 망령을 부려서 자식들이 멀쩡한 노인네를 갖다 버린다는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배려한다.
그녀는 이번 겨울에 나라야마에 간다고 하면서도 내년 봄에 심을 씨앗을 챙겨주고 자기가 떠난 후에 남은 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를 한다. 그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그곳에 가서 생명을 마감해야만 천국을 갈 수 있다”고 계속 얘기까지 했었다. 전날 동네사람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천당에 가려면 새벽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말고, 또 말을 해서도 안되고, 뒤를 돌아보아서도 안되고, 지게에서 내려서는 안 된다는 철저히 버리는 자들의 이기심에서 만들어진 규칙들을 지켜야만 했었다.
죽음 앞에서 40살에 죽은 아들이나 80살에 죽는 할아버지나, 또 아들의 지게에 업혀 가는 오린 할머니나 어찌 죽음이 두렵지 않았겠는가. 아들이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 나뭇가지를 꺾어 던지던 우리나라 고려장의 어머니 얘기. 부모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생명은 고귀한 것인데 자신이 만든 약삭빠른 규율에 엎어지고, 자기도 늙어 다시 덫에 걸려드는 어리석은 인간의 애처로운 이야기를 쓴 것이다.
지난번 뉴올리언스 병원에서 물길이 영혼을 삼키고 오늘은 혹시 아들, 딸이 올까 기다리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휠체어에 기댄 채, 또 침대에 누운 채로 불꺼진 밤, 물이 차 올라 올 때의 그들의 공포와 막막함 속에서 그들은 아마 “이건 아닌데, 정말 이보다는 신비한 죽음이기를 바랐는데, 아들 딸에 둘러싸여서 말이야”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면서 가끔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서 흔들이다 지나감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실들이 우리를 가끔 슬프게 한다.
이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는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보다 행복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기가 있고, 전화가 있고, 자동차, 비행기가 있고, 컴퓨터, 그리고 컬러 텔레비전이 있어 얼마나 생활을 기름지게 하며, 과학의 발달로 오래 건강하게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역사 변화의 중심에 서서 변천을 즐기며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고려장이 없는 풍부한 자원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해야 한다. 어차피 고려장에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서로 슬프고 못할 노릇이니까.
오늘 나는 마음 다스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심호흡하며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이것이 바로 기쁨이고 신비라고 느끼며 감사한다. 그리고 옛날 얘기들을 돌아보며 오늘을 더 값지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이혜란/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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