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그들은 돌아온다. 마켓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올라(hola)를 외쳐대고 손을 흔들고 함박웃음을 보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이 마켓안 가득히 채워놓는 것은 지린 땀 냄새와 하루의 피로다.
그들은 잠시 망설인다. 호주머니속 깊숙이 쑤셔 넣은 하루치 품삯은 아무리 만지작거려보아도 어제와 다를 것이 없다. 방금 막 썰어낸 시뻘건 생육(生肉)을 바라보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만다. 하여 그들이 사는 것은 거의 매일 똑같다. 1달러25센트 하는 또띠아 한 팩과 치즈 한 조각. 두개에 1달러50센트 하는 싸구려 캔맥주.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50센트짜리 스낵 서너 개. 그게 전부다.
그러나 내일은 공휴일. 옆집에선 아마도 바베큐 파티를 할지도 모른다. 유쾌하게 떠들어대는 소리와 웃음들. 춤과 음악과 노래쯤은 참을 수 있는 일. 그러나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냄새, 오, 그 냄새만은. 이런 날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일인가. 마켓을 나서다말고 그들은 돌아선다. 과용은 했지만 큰맘 먹고 사든 고기 몇점은 오늘밤, 그리고 내일 하루치 행복이 될 것이다.
한 떼의 아낙네들이 들어서면서 마켓은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문 앞에서 만나는 이웃과 인사를 주고받는 걸로 시작해서 그녀들은 안면 있는 모든 손님들과 오늘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녀들이 데리고 온 고만고만한 크기의 아이들은 마켓 안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매일 올 때마다 장보러 오는 것인지 수다떨러 오는 것인지 구분이 안가는 아줌마들. 금주의 세일품목만 골라 집으면서도 몇번을 망설이는 그녀들.
이웃 마켓과 비교해서 단돈 몇푼이라도 비싸다는 생각이 들면 바구니에 담았던 물건도 가차없이 내려놓고 마는 이 아줌마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귀밑까지 오는 커다란 웃음을 보인다.
정가표가 붙어있는 야채 한 다발을 집어들고 와서는 깎아 달라고 조르는 그녀들을 보면 나 어린 시절 어머니 따라 용문동 재래시장으로 꽁치 한마리 사러갔던 일이 떠오른다. 내가 시장전체를 두 바퀴나 돌고 다시 어물전 앞으로 왔을 때도 어머니는 양은대야에 생선 몇 마리 놓고 앉아있는 할머니와 흥정을 하고 계셨다.
그러고 보면 가난한 한 때를 지나가고 있는 아낙네들의 장보는 모습은 어디나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술독에 빠진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 마리아는 오늘도 눈물 한 바가지는 쏟아낸 모양이다. 일을 하면 할 수록 점점 더 살기가 힘들어진다는 그녀는 삼십도 안된 나이에 오십도 훨씬 넘어 보인다. 찬거리 몇개와 고기 한점. 그리고는 빠지지 않고 집어드는 40온스짜리 맥주 한 병. 술병을 꺼내오는 그녀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가난에 삭아 보인다.
장보는 아낙네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저녁이 조금 더 깊어지면 또 한 부류의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애인은 있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미고들과 오늘밤은 꼭 걸프렌드 하나 만들고 싶은 젊은 친구들이다. 이 시간이면 창녀들도 마켓을 들락거리며 오늘밤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한다.
젊은 친구들의 돈 씀씀이는 결혼한 연령층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친구들은 하루 뼈 빠지게 일해 번 돈을 하룻밤에 다 써버리기도 한다. 내 마켓안에 있는 맥주로도 성이 안차면 이웃 나이트 클럽으로 몰려가 밤새도록 마시고 춤추고 논다. 내일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인다.
10시가 지나면서 손님들의 발걸음이 뜸해진다. 뒤늦게 술을 사러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아미고들 마저 떠나고 나면 나는 소등을 하고 마켓을 나선다.
맞은편 아파트의 창문으로 보이는 저 순한 불빛들. 이제 그들도 곧 잠이 들 것이다. 오늘 하루치 가난을 돌돌 말아 베고 밤이 주는 위로와 안식으로 정신없이 들어설 것이다.
이윤홍 시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