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와인버거 전 국방장관이 서거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과거 3번씩이나 옷소매를 스쳤던 인연에 옷깃을 여미며 애도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웃 아저씨처럼 인자한 인상, 지혜로운 눈매, 그리고 변호사 출신답게 조리 있는 능변은 언제 어디서나 원고가 없어도 들을 수 있 었다.
필자가 와인버거 국방장관을 만날 수 있었던 행운은 매년 한, 미국방장관이 만나 회담을 하는 한, 미 연례 안보회의의 한국측 공보관이었기 때문이다. 1981년 봄 제13차 한, 미 연례 안보회의가 샌프란시스코의 프레시디오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그 때 지금도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잊혀지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회의가 3일간 열리는데 그 첫날인 4월9일에 한, 미 양측 간에 심각한 갈등으로 회의가 진행되지 못한 것이다. 한국 측이 방산 무기 중 가장 수입이 큰 포신의 수출제한을 풀어줄 것을 미국 측에 강력히 요구했지만 조금도 양보해주지 않았다.
한국 측은 당시 경기가 좋지 않아 포신이라도 많이 팔아서 우리 경제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고 본국에서부터 기대를 잔뜩 하고 왔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국내수요를 채우고도 남은 것을 외국에 수출해야만 달러도 벌고 생산 공장도 계속 가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 측은 자국내 생산자들의 압력을 의식해서인지 살상무기의 확산방지를 위해서인지 절대 불가함을 통첩, 회의 분위기가 급랭했다. 이날 밤중에 우리가 투숙하고 있는 스탠포드 코트 호텔 중앙에 위치한 장관실로 긴급소집 되어 대응책을 논의한 결과 “내일 회의는 보이콧한다. 따라서 내일 아침 본국으로 철수한다”라는 단호한 결단을 내리고 장관 지시에 의해 전원 보따리를 싸기 시작 했다.
이러한 정보가 같은 호텔에 유숙하고 있는 와인버거 장관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른 아침 와인버거 장관으로부터 수출대상국을 파격적으로 늘려줄 테니까 진정하고 가지 말라는 만류의 전갈이 왔다. 만일 한, 미 연례안보회의가 한국 측의 철수로 결렬되었다는 보도가 전 세계로 파져나갔을 때 초강대국의 입장과 한반도의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아찔한 생각이 든다.
다음날 회의에서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한국의 주장대로 13개국에서 31개국으로 포신을 수출할 수 있게 허용하는데 합의해주었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 BC 43-173)가 말하기를 “맞서게 되면 굽히라, 굽히면 정복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수도팔계 중에서 “천하에 가장 용맹스러운 사람은 남에게 질줄 아는 사람이다. 무슨 일에든지 남에게 지고 밟히고 하는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다.”라고 되어 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예나 지금이나 큰 인물의 품성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늘날 미국이 양극화의 군비경쟁에서 소련을 제치고 국제질서를 주도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와인버거 같은 큰 그릇의 인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훌륭한 인물을 가깝게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생의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준 ‘더 리전 오프 메릿’(The Legion of Merit)훈장과 함께 그와의 추억을 길이길이 간직하고 싶다. 88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한 와인버거 전 국방장관의 명복을 빈다.
박종식
예비역 육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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