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5월13일 도산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함으로써 구국이념을 실천하는 일꾼을 양성하는 대사업을 시작하였다.
미주 한인 이민사와 더 나아가 민족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시대가 암울하고 수난이 겹칠 때일수록 걸출한 인물이 많이 탄생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 이다.
인간 공동체가 당면하는 과제 중 가장 큰 사업은 젊은 일꾼을 기르는 일일 것이다. 그 많은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도산 안창호가 역할모델로 길이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 과제를 담당한 까닭이다. 그가 1907년 조국에 돌아가 리버사이드에서 동지들과 발기한 신민회를 국내 지도자들과 만들어 활동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 젊은 인재 양성의 필요성이었기 때문에 흥사단을 창단하였다.
1910년 8월 조국이 일제에 강점 당해 한낱 식민지로 전락한 것도 민족 내에 일꾼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며, 잃어버린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젊은 일꾼 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느꼈기 때문에 도산은 이 사업을 착수한 것 이다. 그는 이 사업에 앞서 지역주의 타파를 가장 큰 과제로 인식, 흥사단 창단에 당시 한반도의 8도 대표들을 모았다. 유감스럽게도 지역주의는 흥사단 창단 93돌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로 여전히 남아 있다.
흥사단에서 배출된 미주 한인사회의 젊은 일꾼들은 대한인 국민회의 기간요원들이 되어 3.1운동으로 탄생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해 도산을 도와 한국독립운동의 중추로 활동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해방된 뒤에도 국내외적으로 그들의 활동이 혁혁했다.
흥사단 운동은 또 대공주의(大公主義)로 발전하였다. 도산 안창호가 1926년 봄 마지막으로 미국을 떠나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며 제창한 대공주의는 창조적 내셔널리즘에 기초를 둔 민족사회의 통합이념이었다.
그가 얼마만큼 나라사랑 계레사랑의 사표였던가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 사랑을 기르는 운동이 흥사단 운동이었으며, 흥사단 운동을 주의주장과 이념대립에 빠져있던 독립운동, 민족운동의 현장에서 재확인하고 제창한 것이 대공주의였다.
대공주의는 개혁적 통합주의, 창조적 중도주의, 폭넓은 사상의 스펙트럼을 포용하는 통일주의, 나의 옳음과 너의 옳음을 존중하는 평화주의이다. 도산 안창호는 민족독립운동의 중심현장인 상해에서 민족세력간의 좌우운동을 통합하기 위해 대공주의를 내세워 결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한반도를 전진기지 삼아 만주를 침략해 괴뢰국을 세우자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에서 일제의 거물 침략자들에게 수류탄을 투척했고, 그 배후인물로 도산 안창호가 붙잡혀 마침내 한국으로 끌려갔다. 도산은 다시 일본이 중국대륙을 침범하면서 국내 애국자 전원을 검거할 때 체포되었다가 1938년 3월10일 결국 순국하였다.
만일 도산 안창호가 오늘 살아계셨다면 지금도 대공주의를 제창하리라 필자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현 국제사회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한국을 통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창단 93돌을 맞은 흥사단의 우선 과제는 유엔의 NGO(비정부기구)에 가입함으로써 흥사단을 세계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병도
LA흥사단 회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