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신앙으로 알 수 있는 신법(神法)이나 이성(理性)으로 알 수 있는 원칙에 입각한 질서”라는 생각이 기독교와 합리주의 전통이 깊은 서양사회에서 우세하다.
그러나 정의란 강자가 자기의 힘을 기르거나 유지하거나 확장하는데 이롭다고 여기는 질서이며, 신학적 또는 합리주의적 정의관은 강자가 사용하는 합리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적 사상이 지금의 후 현대적 풍토에서는 적지 않은 설득력을 행사한다.
물론 힘센 자가 그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신의 의지 또는 이성적 당위라고 변론을 펴는 것도 가능하나 정의개념의 출처, 목적 및 보편타당성에 대한 논란이 종식될 것 같지는 않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 핵무기를 보유하는 국가들이 그들의 서로 다른 정치이념으로 핵 보유를 정당화하는 배후에는 기득 국방력의 침식을 방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정직한 생각이 공통된다. 이런 사실이 힘으로의 의지가 정의관의 원천이라는 사상을 지원하는 역사적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란이나 북한 같이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국가들에게는 핵무기 보유가 정당 또는 부당 하다는 윤리적 논의보다 우선되는게 있다.
이미 핵무기를 가진 국가들과의 역학적 관계에서 그들의 핵 보유 또는 핵 포기가 가져올 득실을 계산해 후자가 이롭다는 판단을 밑받침 하는 실용적 논의가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 윤리나 국제 윤리가 모두 힘의 윤리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지금 인류가 당면하는 가장 큰 윤리적 과제는 창궐하는 인권유린의 방지다.
인권이 무엇이냐, 보편 타당성이 있는 인권 기준이 있는가, 있으면 무엇인가 하는 학문적 논란을 제쳐놓고 인간의 노예화, 인신매매, 소수민족 청소와 학살, 고문, 비인간적 처형, 차별취급 같은 행실은 어떠한 종교 신앙이나 이념이나 이론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일반적으로 납득될 만큼 세계는 계몽되었다.
종교 신앙, 이념 또는 이론이 있기에 앞서 생활경험에서 생기는 윤리적 각성을 윤리체계 구축의 토대로 중요시해야 한다는 이해가 그 계몽의 핵심이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성 회복은 공통되는 인간적 가치들을 탈 이념적, 탈 이론적, 탈 종교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인권을 고려하지 않는 국가적 또는 국제적 정책이 실용적 정당화를 꾀할 수는 있으나 그 정책 시행자의 인간적 원만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2007년이 인권을 존중하고 그러한 존중이 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요소가 되는 해이기를 바란다.
<김진태>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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