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
일곱 번째 한국여행이 아직 일곱 달 남았지만 준비 작업을 시작한다. 책꽂이 한 구석에서 20년 전에 산 책을 꺼낸다. ‘명도 한국어 중급 2권’.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잉크가 번진 타이프라이터 활자가 지난 날 그 책 속에 빠져 지극한 애정과 끈기로 희열을 만끽했던 한국어 문법으로의 여행을 상기시킨다.
그 옆엔 엉성한 그림의 어린이책 ‘장보고’ 전기가 있다. 또 그 옆엔 표지가 지나치게 화려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있다. 책 첫 15페이지엔 젊은 내가 열심히 적어 넣었던 영자 주석이 있다. 남은 페이지들은 아직 읽혀지지 않은 채 색이 바래 있고.
7,000마일 멀리 한국에 처음 갔을 때의 격정을 되살려본다. 1988년 시애틀에서 주유하고 있던 노스웨스트 747을 보며 우주 정거장에서 산소를 뿜어내는 우주선을 연상했다. 그 거대한 새가 푸드득거리며 들을 가로질러 서서히 김포공항에 들어선 다음, 시내로 들어갈 때 한글이 눈에 띄던 그 순간은 경의로울 뿐이었다. 몇 권 되지 않는 책에서나 볼 수 있던 상상의 글자가 현실화 되어 곳곳마다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신기로움은 이미 오래 전부터 더 이상 새롭지 못했다. 그 후 한국을 몇 번 더 방문한 후엔 어떻게 한 국가와 문화에 대한 정열이 연애하듯 필연적 과정을 겪는가 하는 글까지 쓰게 됐다.
얼굴 달아오르는 첫 단계엔 모든 것이 새롭고 아름답다. 내 경우, 긴 등산 후 외떨어진 절에서 맡던 향냄새가, 공손함과 존경심이 적절하게 조화된 한국어가, 자신들의 긴 역사를 잘 알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나를 기꺼이 반겨주던 한국 사람들이 그랬다.
그 다음은 비판적 단계이다. 통도사 마당에 자욱했던 안개가 살충제임을 알았을 때 그랬다. 무한한 존경을 표현하는 한국어의 힘이 약자를 거침없이 차별하는 무례함으로 드러났을 때도 그랬다(술집에서 듣던 “영희야! 이리 와! 시버스 리갈 따라라”).
민족주의가 조화는커녕 소견 좁은 국수주의와 인종차별을 드러낼 때도 그랬다. 한국문화에 대한 자신감도 없으면서 자기중심적인 사춘기 소년처럼 무관심한 세계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가 하면 실제론 그것을 겁내는 것 같아 보일 때도 그랬다.
이제 난 그런 동요의 단계도 이미 오래 전에 벗어났다. 여섯 번 한국을 방문하고 안식년을 서울에서 살고 난 후 한국에 관한 한 ‘중년’이 되었다. 사랑과 미움을 넘어 한국이 내 일부가 된 것이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못하면서도 한국을 나의 일부라 여길 자격은 있는 걸까? 20년 동안 총17개월밖에 머물지 않은 한국에 향수를 느낀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허나 향수를 느끼는 걸 어쩌랴? 그것도 ‘복잡 미묘하게’ 말이다.
이번 여행엔 몇몇 친구를 만나고 싶다. 고인이 된 한 시인의 아내의 찻집에서 모과차를 마시며 그녀의 웃음을 보고 싶다. 인사동 뒷골목의 ‘이모집’ ‘툇마루’ 같은 식당에서 더덕구이나 추어탕을 먹고 싶다. 친구의 시골집에서 온돌에 불 지필 만큼 으슬으슬하게 비오는 밤을 맞고 싶다.
지난 학기 우리 대학의 우수반에서 다문화 언어학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몇 개 외국어를 연구케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어였다. 이들은 한국 하면 MASH와 DMZ만 연상하는 한국에 무관심한 세대가 아니다. ‘섬’과 ‘친절한 금자씨’를 보는 세대이다.
학기말 고은씨의 ‘선’시 중 하나를 골라 암송하라 했다. 모두 ‘올빼미’를 골랐다. “대낮 올빼미/ 눈 부릅떠/ 아무 것도 못 본다”의 ‘부릅떠’를 함께 분석했다. ‘노려본다’는 뜻인가? 잘 보려고 ‘실눈을 뜬다’는 뜻인가? 아니면 우리가 ‘선’을 속단하면서 그 모호함을 묵살하고 있는 걸까?
이번 여름 인천에서 노스웨스트 747 비행기를 내리는 순간 밤과 낮이 바뀌게 된다. 나는 그곳을 ‘눈 부릅떠’ 볼 것이다. 노려보는 걸까? 실눈을 뜨는 걸까?
<케빈 커비>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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