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나 나에겐 비가 내려요. 언제나 비에 퉁퉁 불은 몸뚱아리가 싫어 비 없는 곳으로 달아났지요. 달려달려 로스엔젤레스로 들어섰지요. 저 눈부신 태양. 젖은 몸을 말리려고 옷을 벗었지요. 아,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햇살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달리고 달려도 비는 따라왔지요. … 우의를 주세요. 햇살보다 더 샛노란 우의를 하나 주세요. 그리고 성냥을 주세요. 우의로 가리고 성냥을 그어대면 확- 일어나는 불꽃. 그것만이 나의 온기죠. 나의 따스함이죠. 오우,오우, 언제 어디서나 나에겐 비가 내려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비가 내려요”
키가 작고 깡마른 흑인여자가 마켓 안으로 들어섰다. 때가 꼬지지한 노란 비닐 우의를 입고 있었다. 겁먹은 눈으로 쳐다보면서 뭐라고 했다. 그 말을 못 알아듣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자 갑자기 역겨운 비린내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그녀가 다시 “성냥”하고 말하자 얼른 그것을 집어 건네주었다.
한 쪽 다리를 끌며 천천히 마켓을 나서더니 바로 문 앞에 서서는 성냥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성냥 개피가 다 타들어 갈 때까지 들고 있다가 버리고는 다시 성냥을 그어댔다. 화르르 불꽃이 일 때마다 그녀의 작은 눈이 반짝거리다가 불꽃이 사그라들면서 눈빛도 까맣게 꺼져갔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오면 그녀는 얼른 성냥을 우의 속으로 감추고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햇살이 쨍쨍한 따가운 날에도 그녀는 성냥을 그어댔다.
그녀는 온 종일 걷는 것 같았다. 길을 따라 마냥 걸어갔다가는 다시 길을 따라 마냥 되돌아오는 듯했다. 그녀는 늘 길 위에 있었다. 마켓에서 나와 차를 타고 가다보면 그 길 선상 어디에서든 샛노란 우의를 입고 걸어가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마켓에서 걸어서 20여 분 걸리는 곳의 번화한 사거리에서 하루를 다 보내는 것 같았다. 그곳은 사거리마다 크고 작은 샤핑몰 안에 맥도널드와 온갖 다른 종류의 패스트푸드 음식점들이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어서 복잡한 곳이었다. 흑인들은 인도에 서 있다가 빨간 신호등에 차들이 서면 차도로 내려와 이곳저곳에서 차창을 두드리며 돈을 구걸했다.
그녀는 사거리의 복잡한 신호등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조금만 틈이 나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길을 건너가고 건너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모든 차들이 참을성 있게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그 곳에서 하루를 다 보내고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그녀는 길을 따라 올라왔다. 올라오다가 불쑥 마켓 안으로 들어서서는 성냥을 달라고 했다. 그녀가 담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성냥을 달랜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귀찮기도 하고 또 매일 두세 번씩 그냥 달라는 것이 얄미워서 성냥은 주지 않고 손을 흔들면 울음이 터질듯 한 표정으로 추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제 몸을 두 팔로 감싸고는 몸을 떨며 올려다보았다.
어느 날 아침 그녀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마켓 앞 길 건너 아파트에 사는 흑인들이 발견했다. 노란우의를 잃어버리고 거의 알몸으로 밤새도록 길거리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흑인들이 그녀를 데리고 가 아침을 주고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구세군 중고 가게로 가서 먼저 것 보다 더 샛노란 우의 한 벌을 사주었다.
새 우의를 입은 그녀가 마켓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성냥과 함께 앞에 있던 캔디 몇 개를 집어 주었더니 웬일인가 싶은지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 속에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한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차를 타고 오면서 노란 우의를 입은 흑인 여인이 길가의 보도블록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우의를 머리 위 까지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부르는 노래 소리가 열어 논 차창을 통해 들려왔다.
“언제 어디서나 나에겐 비가 내려요. 오우, 오우 언제 어디서나 나에겐 비가 내려요. 일 년 삼백 육십오일 비가 내려요.”
이윤홍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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