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에서 나는 매일 수십명의 손님들과 만난다. 나나 그들이나 평범한 시민들이기에 우리들의 만남이 어떤 이벤트를 만들지는 않지만 인간적인 상식 안에서 일상의 대화는 이어진다.
80년대 초, 따뜻한 봄볕이 상점 안으로 밝게 비치던 오전, 자그마하고 아름다운 자태의 여인이 오랜 지기처럼 다정한 미소로 사뿐히 문을 밀고 들어왔다. 누구인가? 생각하는 순간, ‘황태자의 첫 사랑’에 나온 미녀 주인공인 앤 브라이스임을 금세 알아봤다.
내 남편을 청년시절 몹시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녀, 근처 톨루카 레이크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잘 알려진 외과의사이며 5명의 아이들을 두고 있다. 아들이 변호사가 되어 자랑스러워하는 엄마인 그녀는 그 후 오랫동안 단골로 우리 상점을 찾았다.
역시 80년대 초, 한 노신사가 핑크색 캐딜락을 타고 와서 차를 세우더니 곧장 우리 상점으로 들어왔다. “남자가 무슨 핑크색 차?” 하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카드 스탠드를 전부 돌아 수십 장의 카드를 계산대로 가져왔다.
계산하는 동안 작은 소리로 노래를 뽑으면서 아시안 여자가 자기를 알아보는지 슬쩍 눈치를 본다. 그가 밥 호프였다. 그는 매번 올 때마다 계속 작은 목소리로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는 타고난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타계한 후 이제는 그의 이름을 명명한 거리 이름만 남아 있다.
우리의 삶은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외에도 유형무형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만남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우리의 일상 또한 계속된다.
우리 인생에서 만남의 긍정적인 면을 보면, 하나의 만남이 진정한 자아발견으로 이어져 자신의 길을 결정하기도 하며, 예술가들에게는 위대한 예술형성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단순한 공간적인 예술인 미술에 처음으로 시간적인 것을 접목시킨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결합을 통해서 최초로 전자예술을 창시한 백남준, 전통적인 음악 관념을 초월해서 음의 한계를 해방시키고 소음과 침묵까지도 음악적 사운드로 간주하는 전위음악을 창시한 존 케이지, 백남준이 존 케이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예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오늘의 포스트모던의 표상적 인물로 그렇게 유명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독일의 시성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루 살로메의 안내로 모스크바에 가서 톨스토이를 만났다. 복음서의 가르침대로 생활을 하는 톨스토이의 사상은, 존재라는 대지에 깊은 뿌리를 내린 릴케의 문학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깊은 골짜기 밑에서 인간실존을 부르짖는 드높은 소리가 바로 릴케의 시인 것이다.
릴케는 덴마크어를 공부해서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서를 읽은 것처럼, 톨스토이의 장편소설로 러시아어를 배워서 톨스토이와 러시아어로 대화했다고 한다.
릴케와 살로메가 2번째 톨스토이를 방문했을 때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닥터 지바고의 작가)가 열살 때였다. 톨스토이의 작품들, 특히 ‘부활’의 삽화를 그려 널리 알려진 그의 아버지 레오나드 파스테르나크를 따라 릴케와 루 살로메와 함께 기차를 타고 톨스토이의 집이 있는 야스나야 플랴나에 갔었다. 후에 보리스는 ‘안전통행증’이라는 자전적 산문집에서 릴케와의 만남이 생애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받은 체험이었다고 회상했으며, 후에 그가 음악의 길과 철학가의 길을 떠나 대시인의 길을 걷게 한 동기가 되었다.
우리가 가진 인식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우리는 전체를 알기가 어렵다. 만남을 통해서 아직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타인의 인식을 통해 새로운 차원을 보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진보하게 된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많은 이벤트를 만나서 우리 생을 다양하게 의미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만남은 모든 가능성의 문이다.
김인자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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