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달’을 외쳐댄 지 그저 몇 밤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또다시 ‘생일달’이라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세월이 날아간다는 느낌을 넘어 아주 통째로 사라져버리는 것 같아 허탈하기까지 하다. 그러다 내 생일달 6월이 되면 잊지 않고 등장하는 ‘6월 민주항쟁’ 기사를 읽으며 문득 너무 빨리 지나가서, 또 잊혀져서 아쉬운 세월이 아니라 오히려 몽땅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들이 떠오른다.
얼마 전 한국정치가 너무 실망스러워 한국에서 살기 싫다고 불만을 토로하던 후배에게 나는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걸 살아생전 본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한 적이 있다. ‘5.18 광주 민주항쟁’을 야기하고도 결국 폭도들에 의한 ‘광주사태’로 낙인찍어버릴 수 있었던 군부독재의 공포스런 시절을 겪고 한국을 떠나오면서 나는 그런 독재가 무너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다시피 했다.
그렇게 엄청난 희생을 받아들이고서도 아직도 멀었다며 우리를 비웃고 있는 듯한 그 민주화라는 신기루 앞에 얼마나 더 많은 제물을 바쳐야만 하나,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기는 한 걸까 한없이 회의에 찼었다.
5.18 당시 끊겼던 전화가 다시 개통되었을 때 엄마의 떨리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선윤아! 엄마 살았다!”
같은 집에서 6.25를, 그리고 30년 후엔 5.18을 겪으신 엄마는 5.18때의 총소리가 6.25때 보다 훨씬 격심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새벽 녘 총소리 속에 군인들이 들어오고 있으니 도와 달라 울부짖던 여학생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시다며 눈물을 보이셨었다.
들려오는 수많은 참담한 얘기들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올랐었고, 얼마후 유학생들끼리 모여 함께 광주항쟁 당시의 비디오를 보면서 모두들 목 놓아 울었던 기억이 있다. 처음 ‘모래시계’가 방영되었을 때는 그 기억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와 차마 볼 엄두를 내지 못했었고 말이다.
여전히 절망스런 소식들이 가끔 들려오기는 했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덕분에 쉽게 관심을 접고 살아갈 수가 있었다. 얼마가 흘렀을까. 정말 거짓말처럼, 꿈인 것처럼 ‘6.10 항쟁’의 ‘승리’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책상을 ‘탁’치니 ‘턱’하고 쓰러졌다”는 박종철군 고문치사살인은폐사건, 아예 국민의 권리를 뭉개고 입을 꿰매 버린 이른바 ‘호헌조치’ 발표, 그리고 학생들을 겨냥해 쏜 최루탄에 맞아 끝내 숨진 이한열군등 함께 들리는 가슴 아픈 수많은 사건과 희생들이 마침내 이루어 낸 승리였다.
이 ‘6월 승리’의 주역으로 빼놓을 수 없다는 이른바 ‘넥타이 부대’라는 새로운 단어도 등장했었다. 더 이상 학생이나 정치인만의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일반시민, 특히 사무실 안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산업발전의 역군으로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고 있어야 할 직장인들, 일명 넥타이부대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의 가세야 말로 군부독재의 숨통을 조인 치명적인 결정타가 되었다.
얼마 전 한 신문사가 그때의 사진 속 주인공들을 찾아 그들의 감회 젖은 이야기를 기사화 했었다. 각자 자신의 현실에서 오늘의 삶을 살며 계속되는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을 20년전 6월 거리의 주인공들. 민주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각계각층의 소리 없는 영웅들, 무어라 그 때의 아픔을, 그 곡절의 세월을 위로해야 할지 그리고 감사해야 할지…
아이들이 아버지날을 맞아 아버지 선물 고르는 걸 도와주다 아버지날 선물의 주품목인 넥타이를 보면서 문득 당시 넥타이 부대원들이 생각났다. 모든 아버지들의 넥타이를 한 가장으로서, 그리고 한 시민으로서 자랑스런 훈장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6월 항쟁의 넥타이 부대원 아버님들 아버지달의 남은 6월 가슴 벅차게 보내시기 바래요!
김선윤 USC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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