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친절. 달콤한 슬픔. 우뢰 같은 침묵. 천천히 빨리 하세요. 이렇게 양립할 수 없는 말을 짜 맞추어 수사적인 효과를 노리려는 어법. 이런 모순어법을 영어로는 악시모란(oxymoron)이라 한다.
내가 여름이 끝나기 전 은퇴 할 계획이라고 말했더니 한마디의 축하나 격려의 말 이전에 친구가 느닷없이 한 말은 좀 뜻밖이었다. “그럼 은퇴 기념으로 얼굴을 성형해서 주름살을 싹 없애버리는 게 어때”라고 친구는 말했다.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가 자기는 늙어가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얼굴, 손, 몸에 있는 모든 주름을 깨끗이 지우려고 하는데 둘이서 함께 하면 좀 싸게 해 달라고 협상해 보겠단다. 그리고는 까르륵 까르륵 웃어 댔다.
설마 농담이겠지 했는데 며칠 후에 다시 하는 말이 진담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 그 친구는 아직도 그만하면 깨끗한 피부를 가졌고 약간의 주름살은 오히려 친근감을 더 해주는 그런 얼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친구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그 돈으로 먼 나라로 여행가서 멋있는 시간을 보내자, 그리고 우아하게 늙어가자.
우아하게 늙어가? 친구가 어이없어 하면서 세상에 그런 말 같지 않은 말이 어딨어? 혼자 우아하게 잘 늙어 보라구. 참으로 한심하다는 어조였다. 아차, 우아하게 늙어간다는 말은 악시모란이구나.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아함’과 ‘늙음’은 억지로 꿰어 맞추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음도 우아함도 오래 전에 강 건너 가고 없다는 현실이 너무도 뚜렷한데 마음이 무뎌서 아직도 착각을 즐기고 있었나 보다. 아마 잡지나 스크린에서 아름답게 나이를 먹은 노익장들의 모습을 본 기억 때문에 너도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기대해 봤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어떤 여자 분이 열 받아서 못 살겠다고 불행한 표정을 하고 한탄한 적이 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매일같이 늘어가는 주름살 때문에 속이 상해서 견딜 수 없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몇 년 전까지 나와 스키를 함께 다니던 젊은 친구는 마흔도 안 된 얼굴을 몇 번씩이나 화학 물질로 벗겨서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스키를 못했다. 돈 쓰고 시간 들여서 그런 고생을 왜 사서 하냐고 내가 물었다.
젊어지기가 쉬운 줄 아세요? 희생을 해야 되요. 나의 우둔한 질문에 그녀는 명답을 주었다. 내가 일하는 도서관에 자주 들리는 또 다른 젊은 친구는 한국에 다니러 갈 때마다 얼굴을 조금씩 개선해 온다. 젊음은 젊음이 아직 남아 있을 때 가꾸어 두어야 한다고, 그녀 또한 현명한 설명을 했다.
스킨케어 의술이 많이 발달되고 소비자들의 이용도가 급증하고 있는 요즘에는 젊어 보이는 얼굴 만들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듯도 싶다. 그러나 나의 젊은 친구들의 말처럼 우선 다운타임을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이 있어야 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존해야 할 젊음이 남아 있어야 될 일이다. 많이 남지도 않은 세월에 며칠이라도 햇볕을 못 본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지 않은가. 다 소진되어 버리고 남아 있지도 않은 젊음을 뒤늦게 가꾸어 보겠다고 무슨 희생을 감수한다는 말인가. 눈으로 보이는 젊음에 관한 한 이제 체념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젊음도 있는가? 밉지 않게 늙어가는 일이라고 위로해 본다. 나이 먹은 것을 감투나 무기로 행사 하지 않을 것. “내 나이가 얼만데”라는 말하지 말 것. 가만히 앉아서 저절로 먹은 나이 핑계대고 어른 대접 받으려 하지 말 것. 젊은 사람들에게도 존대 말 쓸 줄 알 것. 멋 부릴 줄 알 것. 벌어놓은 돈 있으면 쓸 줄 알 것. 노인이라고 줄 서지 않고 새치기 할 생각 말 것 등등.
우아하게 늙어가지 못할지라도 약간의 품위를 지키면서 나이 먹는 것이 밉지 않게 늙는 기술이 아닐까 한다. 차라리 마추피추나 아니면 티베트로 여행을 가자고 친구를 한 번 더 꼬셔 봐야 할까보다.
송정원 / 베벌리힐스 도서관 사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