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마지막 주에 필라델피아를 다녀왔다. 동부에 단풍이 절정일 즈음이 엄마의 생신이다.
내가 필라에 갈 때마다 우리 자매들이 가는 곳은 개발이나 발전을 거부하고 언제나 그 모습인 고향 같은 아담한 관광지 뉴흡이다. 차에 샹송 CD를 꽂고 흩날리는 낙엽을 맞으며 델라웨어 강변을 따라 뉴흡에 이르면 작은 골동품상이나 예술작품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뒤로는 개구리밥으로 덮인 긴 연못 사이로 작은 언덕들이 보이고 맞은편 쪽으로는 강을 낀 아담한 식당들이 즐비한 유럽의 어느 시골 같은 곳을 만난다.
강에 대한 나의 개념은, 아련히 건너편 사람의 몸짓이 보이는 강 넓이에 이끼 낀 조약돌 사이로 실로폰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결을 따라 작은 물고기들의 약삭빠른 지느러미 놀림을 볼 수 있고,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 건너편에 교회 종탑이 보여 환청으로 낡은 무쇠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델라웨어강은 큰 강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구색을 다 갖춘 강줄기 한 지점이 바로 뉴흡이다. 그 강가의 화려하지 않은 아름다움 속에 우리 자매들은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 인근에 한 때는 작가 펄벅도 살았고, 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사랑을 나누던 곳도 있다. 그래서 그 강에 백조가 없을 때도 ‘백조의 호수’ 음률에 맞춰 춤추는 백조를 상상하게 된다. 오색단풍으로 모자이크 된 물결이 발밑을 간지르는 커피샵에서 강을 내려다보며 우리 자매들은 어느새 단발머리 가시내들처럼 쫑알쫑알 킥킥거리며 웃다가 마시던 커피 잔이 비워질 때면 7남매 모두를 미국에 데려다 놓으시고 일찍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 생각이며, 그동안 흩어져 살면서 가슴 한 구석에 압축해 놓았던 아픈 얘기들을 풀어내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고 첼로를 켜고 글을 쓰는 예술방면의 공통분모를 지닌 자매들이라 남달리 감상적이어서 그 곳을 좋아하는데 강가는 변함없어도 해마다 느낌이 다르다.
흑백영화 화면처럼 차분하고 느린 움직임들이 가을 나그네들의 옷자락을 잡고 땅거미가 우울한 기억들을 녹여 살금살금 가슴으로 차오르면 어느새 우리들의 동공에 달무리진다. 이전에는 그 강 언덕을 거닐며 노래를 불렀는데 이번에는 자꾸 옛 시조가 읊어졌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이 냇가에 앉자시니/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네놋다.” 왕방연의 시조를 훌륭했던 남편을 먼저 보낸 동생에게 읊어주다가 어릴 적에 초등학교 교사였던 고모와 고시조 찾기 카드놀이 할 때 속여먹던 얘기를 하며 또 깔깔거린다. 어느새 우리들은 입을 쫑긋대고 지저귀는 물총새가 된다. 새들은 그냥 지저귀는데 사람들은 노래 부른다고 하고, 운다고 한다.
오케스트라의 악기같이 각기 다른 음색을 낼 뿐인데도 카나리아는 노래하고 부엉이는 운다고 한다. 결국 듣는 귀가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대로 들릴 뿐이다.
아픔과 슬픔은 삶을 성숙하게 하고 겸손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수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새들의 노래를 듣고 명랑하게 살 것인가 울음으로 들으며 우울하게 살 것인가!
요즘 남녀노소 없이 우울증 환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염려하고 있다. 해진 뒤 창문으로 비치는 남의 집 불빛은 모두 행복해 보여도 그 지붕 지붕 아래는 남모를 사연들이 다 있다. 나만 슬프고 아프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병이 무섭다.
우리 자매들은 그 강물에 띄워 보내야 할 것들을 다 내놓는다. 그럴 때마다 여러 자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살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위로가 되는 한 곳 쯤 있는 것이 좋다. 형제자매나 친구도 좋고 생각이 같은 이웃도 좋고, 한적한 교외 산장이나 겨울바다, 그리고 갈대와 부들이 피는 호수도 좋고 상한 마음을 기다리는 교회도 좋다.
다가 올 연말연시의 스트레스, 그리고 대통령선거 때만 되면 더 느끼는 정치에 대한 환멸 다 떨쳐버리고 잊었던 옛 시조나 읊으며 느긋하게 이 가을을 보내면 어떨까.
이성호
시인·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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