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학 (가톨릭다이제스트 발행인/변호사)
사법연수원을 마친 뒤 국제거래 전문 로펌에 다니다가 변호사 개업을 하려고 하던 때였다. 전관예우(前官禮遇) 때문에 판검사 출신 변호사가 아니고는 사건 맡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떠돌아 다녔다. 주위 분들도 그런 경력이 없는 내가 사무실이라도 유지하려면 사건을 유치하는 사무장을 따로 두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말을 들을수록 요령부리지 말고 사무실을 한번 운영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법조 고위직을 지냈다는 분이나 브로커를 쓰는 변호사 사무실에 가보면 손님들이 북적북적했지만 한 달이 되도록 내 사무실을 찾는 고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개업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부인 두 명이 상담하러 왔다. 남편들이 집행유예 기간 중에 다시 똑같은 범죄와 더 큰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석방시킬 수 있느냐고 물었다.법원이나 검찰에서 그런 사람을 풀어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내가 석방시킬 수 없다고 사실대로 대답하면 사건을 맡기지 않을 것은 너무도 뻔해 보였다. 나는 첫 사건인지라 꼭 맡아 사무실 임대료도 내고 직원 월급도 주고 싶었다.
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 때 고등학교 시절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던 ‘요령부리지 않고 정직해도 사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건을 맡지 못하더라도 거짓말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남편의 죄가 큽니다. 석방시키기 힘들겠습니다”
그 순간 모처럼 찾아온 사건을 놓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내 예측과는 달리 부인 한 명이 “변호사님! 이 사건 맡아주세요”라고 말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그 부인은 말했다. “변호사님을 만나기 전 몇 군데 법률사무소에 들렀습니다. 거의 모두 돈만 많이 쓰면 남편을 석방시킬 수 있을듯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세운상가에서 첫째 가는 장사꾼입니다. 상가에서 이런 저런 사람을 수없이 상대해 봤기 때문에 누가 거짓말 하는지, 정직하게 말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변호사님이 정직하게 대답해 주셔서 남편의 일을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열심히만 해 주십시오”
그 부인은 내가 요구한 수임료 200만원 보다 더 많은 300만원을 꺼내더니 다시 100만 원권 수표 30장을 내밀었다. 무슨 돈이냐고 묻자 “어차피 변호사 선임에 쓰려고 가지고 다닌 돈이니 그냥 넣어두라”고 말했다.
3,000만원이면 강남에 아파트를 한 채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당시 전재산 700만원으로 전세를 살던 내게는 너무 큰 돈이었다. 필요 없다며 그 돈을 돌려주자 부인은 날마다 전화로 “돈이 더 필요하지 않으시냐”고 물어왔다. 나는 끝내 그 돈을 받지 않았다.
다른 부인은 5,000만원을 들여 전직 법무부장관을 변호인으로 선임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괜히 신바람이 났다. 열심히 변론을 준비했다. 결국 나는 내게 의뢰한 부인의 남편을 더 빨리 석방시킬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전관예우’라는 말 자체가 정직하지 않고 불성실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세상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고 말하지만 실상 법을 다루는 분들은 양심에 따라 결정한다는 확신도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정직하게 살면 잘 살 수 있다는 귀중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요령이 없어 손님 한 명 없을 줄 알았던 나에게 손님은 계속 줄을 이었다. 나를 찾은 손님이 다른 손님을 소개하고 그 손님들이 또 다른 이를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그 때 그 부인에게 남편을 석방시킬 수 있다고 큰소리 쳤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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