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희(SEKA 사무국장)
사춘기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님과 상담하다 보면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고 잘 가르쳐 보려고 이민까지 온데다 밤 늦게 일해가며 좋은 밥 먹여 키우는데 어째서 ‘그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면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꽃이 왜 아름답다고 생각하세요?”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서양 지성에 오래 도전이 된 질문이다. 칸트에서 베버와 퐁띠를 거쳐 푸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서양 근대 철학자들이 이 문제와 씨름했다. 나름대로 답을 내놓았지만 모든 사람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는 못했다.질문의 뜻은 이렇다. “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가? 아니면, 사람이 아름답다고 여기기에 아름다운가?” 아름다움이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의 문제다. 그러나 얘기를 이렇게 풀면 골치만 아프다. 그냥 상식 차원에서 결론부터 얘기하자.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걸 아름답게 느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고나서 돌아서면 또 보고 싶다. 류시화 식으로 말하면 곁에 있어도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자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느끼더라도 귀찮게 여기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상상에 맡긴다.서양 철학과는 달리 동양 사상의 대답은 명쾌하다. 2200년 전에 편찬된 <여씨춘추>라는 중국
사론서에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는 말이 나온다. 춘추시대 초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에서 활동했던 백아(伯牙)는 거문고의 명인이었다. <순자> ‘권학편’에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천자의 수레를 끌던 말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종자기(種子期)는 백아의 거문고 연주를 가장 잘 들을 줄 아는 친구였다. 백아가 산을 연구하면 종자가 ‘태산이 솟아 오르는군’ 했고, 물을 연주하면 ‘황하가 용솟음 치는군’ 했다. 그러던 종자기가 병들어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 연주하지 않았다. 제대로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 연주해서 뭐하느냐는 것이었다.부모의 자식 사랑은 높고 넓고 깊다. 하지만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면 소용 없다. 보는 사람 없는 꽃이고 줄 끊어진 거문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크게 다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데 머무르면 안 된다. 자식이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데까지 부모 책임이다.
꽃은 아름답게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아름답다. 백아의 연주는 종자기가 들어주었기에 명연주다. 자녀가 느낄 수 있을 때 부모의 사랑은 진가를 발휘한다. 그런 자녀는 절대로 ‘그 지경’에 빠지지 않는다. 자식을 사랑하는 데에 멈추지 말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 자식 사랑은 절대로 헛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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