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춘기 (골동품 복원가 )
콜럼버스(1456-1506)가 북미대륙에 오기 전, 2500년 전부터 그 땅에 살아온 흑인을 가리켜 사람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백인사회에서 심각한 논쟁거리였다. 이 고민은 로마교황 바오르 3세가“흑인도 인간이다”라는 선언이 있기까지 무려 50년이나 계속되었다.
1619년 8월 20일 한 척의 네덜란드 선박이 제임스 타운에 소리 없이 입항, 20명의 아프리카 흑인을 내려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이것이 아메리카 역사상 식민지 노동력으로 흑인을 수입한 첫 케이스다. 이름하여 노예의 시작인 것이다. 농경문화의 급성장으로 흑인노예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면서 노예무역선에 종사하는 선장이나 선원들을 바다의 십자군이라 호칭하기도 했다.19세기말까지 백인 식민지에 노예로 팔려간 흑인이 14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나 한사람의 흑인이 무사히 신대륙에 도착하기까지 평균 5명의 흑인이 항해도중 죽었다 하니 실제로는 7000만 명이 통곡하며 고향 땅을 떠났다는 수치가 나온다.
1857년 3월 6일 합중국 최고재판소가 내린 ‘드래드 스코트’ 사건에 대한 최종 결심선고는 노예해방운동에 대한 최후 통첩에 가까운 도전장이라 할 수 있으나 역사라는 긴 안목에서 볼 때 이것은 노예해방운동에 천부적 당위성을 부여해 주었으며 노예옹호론자들에게는 도덕적 치명상을 안겨다 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흑인노예 ‘스코트’는 현재 살고있는 미조리주(노예주)에 오기 전에 노예제도가 없는 자유지역인 일리노이주에서 다년간 거주했다는 사유를 들어 신변의 자유를 주장하는 재판을 연방순회 재판소를 거쳐 합중국 최고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판결문은 이렇다.
『첫째, 흑인노예와 그 자손들은 소유자의 자산이지 합중국의 시민이 아니다. 열등인종인 그들이 백인과 동등한 권리는 가질 수 없다. 때문에 흑인인 스코트는 연방재판소에 제소할 권리를 부여할 수가 없다.
둘째, 스코트가 가령 일시적으로 자유주인 일리노이주에서 살다 미조리주에 왔다 하더라도 스코트는 미조리주의 법률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조리주의 법률이 아닌 일리노이주의 법률에 근거하여 자유를 요구할 수는 없다. 미조리주의 법률에 의하면 스코트는 노예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셋째, 스코트가 부위 36도 30분 이북의 자유지역에서 거주했다는 사실이 그를 자유신분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연방의회는 합중국의 주들에게 노예제도를 금지시킬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820년 미조리주 협정(노예제 폐지)은 헌법위반이며, 노예제도는 이 나라 어디서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불과 150년전의 미국이다. 그로부터 역사는 어떻게 흘렀는가! 연도별 중요 사건만을 간추려 알아보면, 1860년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 당선, 1861년 노예해방전쟁(남북전쟁), 1863년 노예해방선언, 1865년 링컨 대통령 암살, 1903년 ‘흑인의 혼’출판(대보이스) 1961년 자유를 위한 승차
운동개시, 196S3년 킹 목사 워싱턴 대행진, 1965년 말콤 X 암살, 1968년 킹 목사 암살....역사는 말하고 있다. 흑인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닌 역사의 필연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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