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부터 일반에 개방 갤러리 오픈
1월 말 50여명의 알재단 회원들이 아티스트 스튜디오 탐방 행사로 맨하탄 이스트빌리지에 있는 김 포(김보현) 화백의 스튜디오 겸 갤러리를 찾았다. 라파에트 스트릿 선상 8층 건물내에 있는 김 화백과 설치작가인 부인 실비아의 작업실은 펜트하우스를 포함한 옥상 정원, 7층의 또 다른 작업실 그리고 4층의 갤러리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마다 100평이 넘는 공간들로 금싸라기 맨하탄 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넓은 장소들이다. 게다가 오래적부터 좋아해 키운다는 각종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희귀 난들로 채워진 옥상 정원에서 맨하탄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매일 아침 식사를 즐긴다는 그에게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방문객은 한명도 없다. 그는 78년부터 이 건물에 거주해왔고 3년전부터는 자신과 부인의 작품을 교육적인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갤러리로 오픈했다.
탐방객이 아닌 자신의 공간을 개방한 김 포 화백에게 직접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물었다. 예술가의 작업실을 찾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싶어할까? 김 화백은 “글쎄, 뭐 나야 모르지”라고 짧게 대답했다. 김 화백의 과묵함은 사실 그의 후기 작품을 본 사람들이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내면적 세계의 안정감을 보이는 작품, 정밀한 드로잉을 통해 그만의 철학적 사고가 잘 보여지는 작품, 특정 구도나 구성을 배제한 채 즉흥적인 형태로 표현한 작품 등 심오한 작품들을 만들어내 미국 화단의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늘 같지는 않았다. 50년대 후반 미국 초기 시절 추상 작품들에는 격변의 시대를 감당했던 그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잘 묻어난다. 191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김 포 화백은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와 태평양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1946년 조선대학교에 미술학과를 설립하고 초대학과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좌익 혐의로 고문을 당하는 등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내다가 1955년 도미했다.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뉴욕에 온 후 히피와 펑크 음악과 그래피티가 넘실대던 60~70년대의 빌리지를 고스란히 한복판에서 겪었던 원단 뉴욕 아티스트다. 그래서 김 화백에게는 코스모폴리탄의 정취가 넘치기도 하고 혹은 정반대로 무국적자의 허무가 짙게 풍기기도 한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말보다 일본어가 능숙하고 뉴욕이 서울이나 광주보다 익숙하다. 한국도 미국도 일본도 그에겐 모두 고향이며 동시에 진정한 고향은 아닌 것이다.
90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김 화백은 100살까지 작업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고 “좀 더 좋은 작품을 하고 싶은 것이 남아있는 유일한 욕심”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에게 만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지 새삼 궁금해졌다. <박원영 기자>wypark@koreatimes.com
김 포 화백이 빌리지에 있는 자신의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40년대 작품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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