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동안 푹푹 찌던 더위가 한 풀 꺾였다. 창문을 열고 자면 이젠 춥다. 아침에 베란다에 나가보니 테이블이 비온 것처럼 축축하다. 밤새 이슬이 많이 내렸다.
마침 한국 티비 채널에서 24절기 중의 하나인 백로(白露)라고 한다. 흰 이슬이 내리며 가을 분위기가 완연해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백로에서 추석까지는 오곡이 무르익는 시기이다. 옛 사람들은 이 시기에 기러기가 날아오고, 제비가 돌아가며, 새들이 먹이를 저장한다고 하였다.
처서 복숭아, 백로 포도 하듯이 철따라 과실의 맛이 무르익는 시기가 있다. 복날 먹는 여름 과일인 참외나 수박의 맛은 요즘엔 별로이지 않은가 말이다. 예전부터 과실 맛으로 절기를 느끼곤 했던 것이다. 백로에서 추석까지를 포도순절이라 했다. 지금이 바로 그 포도의 계절이다.그 해 첫 포도를 따면 그 집 맏며느리가 한 송이를 통째로 먹어야 하는 민속이 있었다. 주렁주렁 달린 포도알로서 다산을 상징하는 주술이었을 것이다. 우리집의 담장에도 포도가 탐스럽게 열렸다. 다산과는 거리가 먼 5학년 중년 아줌마여서, 포도송이를 통째 먹을 필요는 없었다. 뒷뜰에 내려가 한 알 따서 맛을 보려니, 그 새 청설모가 포도알을 다 떼어먹고 앙상한 줄기만 남겨두었다. 얼마나 억울하던지.
9월에는 꼭 한번쯤 먹어야 한다는 무화과가 자줏빛으로 먹음직하고 석류도 빨갛게 열렸다. 대추도 가지가 휘게 달려있다. 감도 주렁주렁 달렸다. 맛 좋은 과바(Guava)도 열렸다. 마켓의 과일 섹션을 통째로 소유한 듯 부자 된 기분이다. 텃밭의 토마토, 피망, 오이도 탐스럽다. 뒷뜰에 나가 노동도 안하면서 그 수확에는 관심을 가지니 확실히 나는 전생에 아씨마님 이었나보다. 그러기에 뜰을 관리하는 돌쇠를 거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아무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더웠던 지난 여름에도 자연은 부지런히 움직였나보다.
더위도 더위려니와 산불은 얼마나 극성이었던가. 스프링클러도 제한 시간이 있어서 물도 충분히 주지 못하였다. 가문 땅에서 수분을 끌어 모으고 이글이글 햇볕도 받으면서 안으로 안으로 단맛도 만들고 먹음직한 과일의 색도 스미게 하였으니 대견하기도하다.
더위를 핑계로 외식할 이유가 당당했고, 누워서 게으름을 피워도 다 용서가 되던 여름이었다. 역시 자연은 위대하였다. 묵묵히 소임을 다해서 그 열매를 내보이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의 낙엽을 단체로 청소하러 나갔던 여고 시절이 생각난다. 앞치마를 입고 머리 수건을 쓴 우리가 싸리비로 낙엽을 쓸고 있을 때, 젊은 데이트 족이 지나가면 한 없이 부러운 나머지 공연한 저주를 퍼붓곤 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반드시 헤어진다더라!” 나는 경복궁 앞의 금빛 은행잎 위를 걷고 나서 첫사랑과 헤어졌으니 잘못된 주술인가? 심통의 부메랑인가?
비숍의 은사시나무가 금관의 장식같은 노란 이파리를 흔들고, 이웃집의 단풍도 붉은 빛을 머금은 화려한 가을이다. 서로 자기를 봐 달라는 나뭇잎과 열매들의 웅성거림에 고독하거나 쓸쓸할 새 없는 가을. 뒷마당의 단감 속에서 가을이 익고 있다.
이정아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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