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종(전 연합감리교회 감독)
지난 22일 저녁 뉴욕 알메니안 교회의 성 바탄 대 강단에서 114년의 역사를 가진 뉴욕교회협의회가 모범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을 표창하는 행사가 있었다. 여섯 명의 수상자중 한국인이 두명이나 표창을 받았다. 그들은 한인 창업자로 알려진 강현석 후러싱 제일교회 장로와 뉴저지 장로교회 담임 김창길 목사였다. 두 사람 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음을 증언하는 신앙 간증으로 청중을 감동시켰다. 오늘의 한인 이민사회의 발전을 보면서 한편으로 우리 이민의 선구자인 서재필 박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1884년 18세에 과거에 장원급제 했다. 피 끓는 애국 청년 서재필은 20세에 조국의 개혁을 위하여 갑신정변 주동세력에 참가하게 된다. 혁명은 청국군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구사일생 자기는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역적으로 정죄 받은 그는 삼족을 멸하는 가혹한 처벌을 받아 부모와 형제, 아내가 사약을 받고 두 살 난 어린 딸마저 잃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그는 아펜셀러 박사의 도움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말도 서툰 낯선 땅 미국에서 많은 고생
을 했으나 열심히 일해 고용주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샌프란시스코의 한 신문은 그 당시 들어보지도 못한 ‘코리아’라는 나라에서 온 청년 서재필의 사진과 기사를 실었고 우연히 그곳 한 호텔에서 묵고 있던 펜실베니아 탄광의 제벌 홀랜박씨는 그 신문기사를 보고 호기심에 이 한국에서 망명왔다는 이 청년을 만나 보게 된 것이다. 이 만남이 계기가 되어 그의 도움으로 서재필은 펜실베니아 힐만 아카데미라는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던 그는 영한사전을 스스로 만들어 가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고 한다.
그는 11년 후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미국에서 배운 넓은 견식과 민주주의 사상을 후진 조국에 도입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눈부신 정신개혁의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운동은 성공을 거두지 못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에 배재 학당에서 가르치며 독립협회를 만들고, 한글로 독립신문을 내고 서대문에 독립문을 세우는 등 역사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다.그 후 그는 필라델피아에 자리잡고 한인 최초의 의사 개업을 하였고 한인 최초의 창업자로 문구점과 인쇄소를 시작하니 그가 세운 한인 최초의 회사 필립 제이슨 앤드 컴퍼니는 미국인 직원이 20여명이나 되는 큰 사업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서 박사는 최초의 미국 시민으로서(1890년 시민권 취득)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으로 여러 가지 길을 여는 선구자가 되었기에 우리
의 롤 모델로 선양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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