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꼬마가 있었다. 세상에서 접하는 모든 것이 마냥 새롭고 신기하고 멋져 보였던 아이였다. 하얀 보자기를 쓴 도깨비들이 출몰할 것 같은 캄캄한 밤을 두근두근 새고 나면 푸른 안개를 제치고 가을아침이 오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런 가을의 날이 밝으면 집안 어른들은 집 주위에 줄줄이 흐드러지게 열린 대추, 밤, 감을 땄다.
초여름이면 하얗게 핀 감꽃이 우물가 마당으로 밤새 눈처럼 떨어져 있었다. 여동생과 둘이서 새벽 일찍 일어나 싸리비로 쓸기 전에 바구니에 주워 담았다. 심심하면 하나씩 먹어가며 무명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서로 걸어주며 종일 가지고 놀았다. 감꽃에 푸른 콩알 만한 열매가 맺히고 점점 커가더니 가을이 되자 주먹만 한 주황색 감이 되었다. 별다른 수고를 하지 않아도 나무들은 많은 과실을 안겨 주었다. 그 풍성함으로 인한 포만감은 한 뭉텅이의 지폐와도 바꿀 수 없는 생생한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가을이면 모든 것이 마술처럼 풍성하게 보였던 아이도 자라 어른이 되었다. 어느새 인생의 무성한 여름은 지나고, 초가을을 맞이하니 옛날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 머지않아 장년기를 보낼 테고 곧이어 노년기를 맞을 나이가 되면서 증조할머니와 큰고모가 자주 떠오른다.
증조할머니는 독서광이셨다. 교회를 다니지 않으시면서도 전도용으로 받은 성경책까지도 열심히 읽으시던 분이다. 한국 고전문학은 물론이고 중국 고전도 읽으셨다.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책방의 중국 고전설화 책에서 발견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다. 할머니께서 책을 읽으셨지만 유년기에 나는 독서에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만한 놀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나의 유년기 적에는 지금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쁜 그림책도 없었다.
할머니는 한 번도 언성을 높이지 않으셨다. 야단맞은 기억도, 우리 형제자매 누구를 꾸짖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혹시 편찮으셔도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으셨다. 항상 책 읽기에 골몰하거나 마당의 꽃밭을 손질하셨다. 어두워질 때까지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돌아와 두레상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고 나면 할머니는 우리를 앉혀놓고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야기는 매일 밤마다 끝이 없었다.
큰고모는 이십대에 청상이 되어 친정인 남동생 집으로 와 우리와 함께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청상과부로서의 열등감 때문에 우울하실 것 같은데 언제나 당당한 모습이셨다. 큰소리를 내시는 법 없이 역시 집안 어른으로서의 모범을 보이셨다.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고 호리호리하게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재혼을 하실 법도 한데 한 번도 그쪽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래서 “자고로 민씨 여자들 콧대 센 것은 알아주어야 한다”는 이웃어른들의 말을 자주 들은 적이 있다.
사농공상의 잔재가 남았지만 체면을 가리지 않고 큰고모는 시장에서 큰 그릇점을 하셨다. 그렇게 돈을 벌어서 우리 칠남매 성장기 내내 제일 비싸고 좋은 옷을 사 입히셨다. 내가 어쩌다 벼락치기 공부를 한답시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면 살며시 와서 "잠을 못 자면 몸이 약해진다. 건강을 해치면서 해야 할 만큼 그렇게 공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다. 쫓기듯이 공부하는 내 마음을 한없이 편하게 하셨다.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라는 말은 빈말이라도 없었다.
지나고 보니 알겠다. 그 시절에도 다른 아줌마들은 모여서 수다와 남 험담으로 시간을 보내거나, 허구 헌 날 모여 화투놀음을 하거나, 곗날이라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던 모습이 기억난다. 할머니나 큰고모는 그런 모임에 일체 기웃거리지 않으셨다. 홀로 자신만의 세계에서 점잖게 당당하게 거침없이 인생길을 보내셨다.
책읽기를 무척 좋아하고 나만의 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를 볼 때 증조모와 큰고모가 내 삶의 롤 모델이 되어왔음을 쌀쌀한 가을바람이 문득 깨우쳐 준다. 너나 구별 없이 세월이 갈수록 육신은 낡아져 아프다. 하지만 내면은 강철처럼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윤선옥 /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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