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상사 못지않게 부하 직원도 잘 만나야 비로소 직장생활이 즐거워진다. 주위에 보면 부하 직원에게 시달려 삶이 고달픈 보스들이 의외로 많다. 나도 간교한 부하 직원을 만나 심히 속병을 앓은 적이 있다. 그런데 직장을 떠날 각오까지 하게 만들었던 그 고민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풀려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어느 해 추수감사절 때였다.
멕시코 초급 대학 출신인 살바돌은 공원으로 일하다 나의 추천으로 실험실에 들어왔다. 그는 고분고분 나의 지시를 잘 따랐고 사원들은 그를 나의 오른 팔이라고 불렀다. 2년 뒤 나는 그를 수석 테크니션으로 승진시켰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부터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사사건건 대들기 시작했다. 새 프로젝트나 고객에게 보낼 실험 보고서의 약속 날짜를 고의로 어겨 종종 나를 골탕 먹이고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기 일쑤였다. 나의 승낙 없이 실험실의 각종 자료와 정보를 은밀하게 공장장 윌리에게 제공하고 때로 그의 지시에 따라 엉뚱한 일을 하기도 했다.
윌리는 업무상 가끔 나와 부딪혔다. 그는 실험실이 불합격 판정을 내린 제품을 수시로 합격제품으로 둔갑시켜 내보냈다. 회사 물건을 쓰레기 트럭에 실어 빼돌리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적도 있었다.
나는 살바돌이 동향인 윌리와 가까이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윌리의 사주를 받아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나의 오른팔’을 섣불리 잘라버릴 수가 없었다. 부하에게 시달려 사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나의 마음을 짓눌렀다. 나의 고민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드라마의 막이 올랐다.
추수감사절 전날, 살바돌이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그의 책상 위에 초컬릿 한 상자를 갖다 놓았다. 그 초컬릿은 곧 실험실 테크니션인 마크의 눈에 띄었다. 마크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UC어바인 학생이었다. 마크가 나를 흘끔 쳐다보며 장난기가 밴 웃음을 흘리더니 초컬릿 상자의 포장을 조심스레 풀어헤쳤다. 그는 실험실 동료들에게 초컬릿을 돌려 선심을 썼다. 그리고는 감쪽같이 재포장한 초컬릿 상자를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자리에 돌아온 살바돌은 초컬릿 상자를 누가 볼세라 얼른 책상 서랍 속에 보관했다가 집어 들고 퇴근을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한 하루였고 회사는 이틀간의 감사절 연휴에 들어갔다.
연휴를 마친 첫 출근 날. 굳게 닫힌 윌리의 사무실 안에서 고성이 새어 나왔다. 고성은 10 여분 동안 지속되었다. 드디어 사무실 문이 세차게 열리며 얼굴이 뻘겋게 상기된 살바돌이 윌리를 행해 삿대질과 욕지거리를 해대며 나왔다. 그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씩씩대며 다가왔다.
"용서해 줘요! 윌리의 꼬임에 빠져 못할 짓을 했습니다. ‘미스터 씨’를 괴롭혀 회사를 떠나도록 만들면 책임지고 후임으로 나를 추천하겠다는 윌리의 약속을 받았었지요. 가끔 용돈도 받아썼습니다. 미스터 씨! 못된 부하의 횡포를 용케 오래 참아주었어요." ‘미스터 씨’는 사원들이 즐겨 부르는 나의 애칭이다.
살바돌이 떠난 뒤에야 나는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사건의 불씨는 윌리가 살바돌에게 감사절 선물로 준 초컬릿이었다. 마크가 빈 초컬릿 상자를 고무 자투리들로 채웠다는 사실과 온 가족이 둘러앉은 가운데 초컬릿 상자를 열어본 살바돌이 분노로 치를 떨며 날밤을 새웠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아침부터 날벼락을 맞은 윌리가 제정신을 차리고 사건 진상파악에 들어갔고 장난기가 발동해 악의 없이 일을 저지른 마크가 시말서를 쓰는 선에서 사건은 매듭지어졌다. 윌리는 그 뒤 경영진이 바뀌면서 해고당했다.
인생이 소설 같다더니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것은 분명코 하나님의 작품이었다. 고민 끝에 새벽 기도회에 나가 며칠 무릎 꿇은 나의 연약함을 보시고 하나님이 연출해 내신 드라마가 아닌가 한다. 초컬릿으로 내 고민을 식은 죽 드시듯 해결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기억이 새롭다. 돌아보면 모든 게 감사의 조건들이다.
황시엽 / W.A. 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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