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가진 편모들이 동병상련하는 고민거리가 있다. 웨딩마치에 발맞춰 딸의 팔짱을 끼고 입장할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남편의 빈자리가 새삼 느껴지는 때가 바로 딸들의 결혼식이 아닌가 한다. 대개 신부 측 오빠나 삼촌 등 집안 남자들을 내세워 문제를 해결하지만 마땅한 남자 대역이 없어 곤혹스런 가정도 흔하다. 그럴싸한 대역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고 나타나는 게 아니다.
친지의 부탁으로 결혼식에서 신부 아버지 대역을 맡았던 경험이 있다. 생면부지의 신부와 웨딩마치에 발 맞춰 입장하며 낯선 대역의 팔짱을 낀 신부의 심정은 어떨까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문득 신부 어머니는 왜 대역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딸이 없는 나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지만 대역이 나에게까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대역 캐스팅의 심각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말기 암 환자의 딸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신부 아버지는 병세가 중한데다 거동이 불편하여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결혼식장에 나타났다. 그는 딸의 웨딩마치를 치른 뒤 눈을 감겠다고 유언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아버지 없이 치를 딸의 결혼식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웨딩마치가 울려 퍼지자 신부는 오빠가 미는 휠체어에 식물인간처럼 앉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훔치며 입장했다. 순간 들뜬 식장 분위기가 숙연해지며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도 건강한 신부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하면 왜 안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스쳤다.
지금까지 편모슬하의 신부 결혼식에 여러 번 참석했었지만 대역들은 하나 같이 남자였다. 어느 편모는 세 딸의 결혼식 때마다 본의 아니게 매번 대역을 바꿔치는 바람에 “끼 있는 장모”라는 농담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대역이니 당연히 남자의 몫으로 치부한 그 편모는 꿈속에서도 대역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 것은 남자이기 이전에 부모이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사돈의 팔촌은 물론 나처럼 신부와 아무런 연고가 없어도 당당히 대역을 할 수 있는데 왜 부모인 어머니는 안 되는 것일까?
여성 고유의 영역인 임신과 출산을 빼고 남녀 역할의 구분이 거의 사라진 오늘날에도 관혼상제는 남녀평등의 사각지대로 남성 파워가 건재한 영역으로 남아있다. 관혼상제에 얽힌 관행은 거스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관행의 유래를 알고 나면 오히려 과감히 깨버려야 하는 게 관행이다. 신부가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입장하는 현행 서구식 결혼의식에도 그 기원이 있다. 결혼이 양가에 의해 성사되었던 과거에는 결혼식 전까지는 신랑 신부가 맞대면할 기회를 전혀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신부의 외모를 보고 신랑이 파혼을 해버리거나 줄행랑을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혼식이 시작되고 신부의 아버지가 딸을 신랑에게 인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부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 실제로 결혼식 때 신부가 얼굴을 면사포(베일)로 가리고 입장하던 관습은 그로부터 유래되었다.
딸과 팔짱을 끼고 입장하며 신랑이 혹시 딸을 보고 내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아버지가 요즘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가 인도하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오던 신랑은 군소리 않고 신부를 맞게 되어있다. 신부를 베일에 가리고 혼례를 치르던 시대는 면사포와 함께 이미 사라져 버렸다.
편모 편부 가정이 늘어나는 요즘에 부모나 남녀의 역할을 따진다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결혼식에서도 성차별이 사라질 때가 다가오고 있다.
“신부가 엄마와 함께 웨딩마치를 하는 게 아주 보기 좋던데.”
최근 한 결혼식에 참석했던 친지로부터 전해들은 소식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윈 신부는 엄마가 않겠다면 혼자 입장하겠다고 대역 선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엄마를 협박(?)해 대역을 맡겼다고 한다. 관행이나 고정관념을 깨면 새 세상이 열리며 불가능하게 여겼던 난제들이 술술 풀리게 된다. 앞으로 편모슬하의 딸들이 엄마와 함께 하는 웨딩마치 소리를 자주 듣게 되었으면 좋겠다.
황시엽
W.A. 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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