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하순 서울을 방문했다. 어느날 동생부부를 따라 남산 산책길을 걷게 되었다. 그 옛날 뮤지컬을 보러 다녔던 국립극장(해오름극장)에서 시작되는 산책로가 남산의 옆자락을 오르락내리락 휘돌며 4킬로미터에 걸쳐 참으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아직 봄기운이 돋기엔 조금 이른 때였지만 그래도 얼굴에 닿는 바람결엔 어느듯 달콤함이 베어 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에선 따스한 새봄의 향기마저 묻어나는, 그야말로 산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모처럼 쾌청해진 날씨 탓인지 산책객들이 무척 많았다. 공휴일도 아니고 주말도 아니건만 가족과 연인은 물론 등산복 차림의 그룹들부터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운동화만 바꿔 신고 나온 듯한 회사원 그룹까지 다양했다. 직장이나 주거지로부터 가까이 있다는 남산의 좋은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이리도 쉽게 산책을 일상으로 즐기게 된 모양이다.
양 방향의 넓은 산책로는 올림픽 릴레이 코스처럼 패딩이 되어 무릎에도 무리가 없도록 되어 있을 뿐더러 자동차는 물론 자전거나 롤러 스케이트도 못 들어오는 곳이기에 연로하신 분들과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우들도 많았다.
산책로를 되돌아 걸어 나올 때였다. 유독 내 눈에 확 들어오는 한 커플이 있었다. 언뜻 보아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시각 장애우 부부였다. 팔짱을 끼고 미소를 담은 얼굴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는 소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느꼈다. ‘저것이 행복이구나’ ‘참으로 사랑하는구나’하는 생각이 곧바로 들었다. 말 한마디를 나눈 것이 없고 오랫동안 지켜 본 것도 아니고 이미 속사정을 아는 바도 아니건만 순간적으로 전해지는 그 편안한 아름다움은 대체 무엇일까! 두 사람의 넉넉함이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길가의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많은 소리들이 머리위로 윙윙 지나가는 듯 싶더니 이내 머릿속이 맑아지고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 그때였어. 우리 둘이 새 삶을 시작했을 때. 가진 것 없고 이룬 것 하나 없을 뿐더러 아직은 서로에게 부족하고 모자란 것 투성이였지만 둘이 함께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샘물처럼 퍼올리며 살았던 시절. 눈 뜬 장님으로 걷던 산책길에서 달콤한 추억 하나를 찾아 들게 되어 마음속 가득히 봄기운이 돋아난 멋진 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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