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후 인사부에 갔다가 로즈에게 걸려들었다. 공장 안전 담당요원인 그녀는 마침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불러 세웠다. 무슨 말을 하려나 하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내가 다 봤는데” 한마디 하고 그녀는 입을 닫았다.
로즈에게는 꽤 짓궂은 구석이 있다. 그녀는 자기가 본대로 이실직고하라고 나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할 말이 있다면서 왜 내가 털어놓기를 바라는지 속셈을 모르겠다. 급히 머릿속을 휘저어보았으나 딱히 집히는 게 없었다. 언제 보았다고 날짜라도 짚어주면 도움이 되련만 그녀는 무심했다. 잠자리에 들면 하루 일과도 기억에서 가물거릴 때가 많은데 지난 주말 행적까지 추적해야 할 판이니 ….
내가 감을 못 잡고 멍하니 서있자 그녀는 뭐가 그리 재미나는지 웃기만 했다. 도대체 뭘 보고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일어났다. 부끄러운 장면을 로즈가 목격한 것 같아 얼굴마저 화끈거렸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지난 금요일 퇴근 이후 나의 행적을 되밟아보기 시작했다. 퇴근 뒤 처음 들른 곳은 회사 근처 공원이었다. 이 공원은 점심때나 퇴근 뒤에 차를 몰고 종종 찾아가 낮잠을 즐기거나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한 달에 두어 차례 차 안에서 코털을 다듬기도 한다. 차에 소형 가위 하나를 비치해 놓고 있다.
‘아하! 그날 내가 삼매경에 빠져 코털 다듬는 장면을 그녀가 훔쳐본 게 틀림없어!’
그게 다 타인의 기분을 상치 않게 하려는 자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고 보면 내가 떳떳해져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진실을 고백하고 이 불편한 자리를 속히 벗어나고 싶었다.
“공원에서 나 코털 다듬는 거 봤냐?”
로즈가 입을 한 손으로 가리고 킥킥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첫 예측이 여지없이 빗나갔으므로 나는 재빨리 다음 행선지와 행적을 떠올렸다. 토요일 오전 나는 대형 백화점들이 들어서 있는 ‘메인 플라자’를 찾았다. 추위를 쉬이 타는 병약한 아내의 부탁으로 여성용 내의를 구입할 생각이었다.
나는 갑자기 아이스크림 생각이 났다. 콘에 우뚝 담아 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얘들처럼 살살 핥아먹으며 쇼핑객들 사이를 빠져나갔다.‘맞아! 아이스크림에 팔려 로즈를 모른 척하고 지나친 모양이네.’
“아이스크림 핥아먹는 거 봤지?”
그녀는 ‘노우’‘노우’를 연발하며 이번에는 입도 안 가리고 웃어댔다. 그녀도 예상 밖에 펼쳐지는 나의 고백이 흥미진진한 모양이었다.
나의 발길은 메이시 백화점 여성복 매장으로 행했다. 나는 여성 내의를 손으로 쓰다듬어 보고 들었다 놓았다 하기를 되풀이 했다. 나는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내의를 골랐다. 로즈가 보고 여자 친구에게 선물할 내의로 오해한 걸까?
“메이시에서 봤냐?”
그녀는 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계속 삼천포로 빠지고 있었다. 내의를 사고 나니 점심시간이었다. 푸드 코트에서 샌드위치를 시켜먹었다. 마침 옆 자리에 앉아있던 참한 한인 여대생과 대화를 나눴다. ‘오라! 이 장면을 젊은 여성과의 밀회쯤으로 착각을 한 게로군’
내가 막 고백을 하려는 찰나, 로즈가 나의 대답을 가로막고 나섰다.
“칭찬 좀 해주려고 했지. 도로 변에 네 차 세워놓고 차도에서 고장 나 멈춰 선 차 끙끙대며 밀어주는 거 봤다 이거야! 바쁜 요즘 세상에 누굴 돕는다는 게 쉽지 않거든.”
그녀가 내 등을 툭 치며 깔깔댔다. 금요일 퇴근 직후 공원으로 가는 길에 발생한 일이었다. 윤동주의 ‘서시’가 떠올랐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칭찬해주겠다는 사람 앞에서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마냥 졸아들었으니……. 하나님 앞에서는 감출 수 없는 마음 속 숱한 부끄럼을 다 어이할꼬.
황시엽
W.A.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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