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의 대상이다. 죽음은 허무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단절을 부른다. 죽음의 순간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마지막 죽는 순간의 실체를 알기위해 숨을 1분 동안만 멈추어본다. 30초만 지나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1분가량 되면, 목, 가슴과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이 밀려온다. 몇 분만 더 참는다면 나는 정신을 잃고 죽게 될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죽게 되는 것은 신이 주신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宿命)이다. 이 찰나 같은 세상을 사는 동안 자신만의 호의호식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이 참다운 인생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한번 뿐인 죽음을 무의미, 무가치하게 맞이 할 수는 없다.
평소에 꽃을 잘 피우지 않는 전나무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해에 유난히 화려한 꽃을 피운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앙스트 블루테(ANGSTBLUTE)라고 하는데 ‘불안할 때 피는 꽃’이란 뜻이다. 전나무는 스트라스 바리우스 바이올린, 과르네리 델 제수 첼로 같은 명기에 사용되며, 죽음의 불안이 다가오는 죽기 전 마지막 해에 생애 최고의 꽃을 피우고, 그의 몸은 죽어서 역사에 길이 남는 명기에 헌납된다.
인간에게도 죽음의 문턱에서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사람이 있다. 악성(樂聖)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27살 무렵 귀가 들리지 않아서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없는 절박한 순간을 맞아 깊이 좌절하여, 죽음을 결심하고 유서까지 작성했었다. 하지만 앙스트 블루테의 힘, 위대한 창조의 힘으로 그의 꽃은 화려하게 피기 시작했다. 청력이 손상된 이후에 불멸의 교향곡 3번 ‘영웅’, 5번 ‘운명’, 9번 ‘합창’ 등을 작곡했다. 죽음보다 더 깊었던 창조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장애를 극복하고 창조의 앙스트 블루테를 피워낸 것이었다.
지난 해 친지들의 모임에서 한 분이 우스개로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남편과 결혼 하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3명의 아내들이 ‘아니오’라고 말하며 자신의 이상형과 결혼하겠다고 답했다. 마지막 나의 아내 차례가 왔다. 기대가 컸지만 아내도 내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우리 부부는 결혼 후 지금까지 함께 살면서 작고, 큰 갈등 속에 살아 왔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지난날의 모든 허물들은 하나의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이제 길지도 않은 죽음을 향한 세월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함께 살아가는 동안만이라도 고통과 상처를 주는 말을 더욱 삼가고, 아내를 더욱 사랑해야겠다.
내가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나는 다시 한 번 지금의 아내와 더불어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다. 또한 더 이상의 인재가 일어나지 않고, 전쟁의 위협이 없으며, 더 이상 눈물 흘릴 일이 없는 세상, 더 이상 죽음이 없는 곳,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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