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한국 문화원에서 초청한 김기택 시인의 강연회가 있었다. 강연 전에 펼쳐진 우리 고유의 가야금 연주와 장구는 한국인의 얼이 담긴 신명 난 연주였다. 이색적으로 외국인이 한국말로 낭송을 하기도 했다.
김 시인은 길 위에서 시를 구상 한다고 했다. 서울의 도심지는 많이 시끄럽고 버스나 전철을 타는 동안 소음 가운데서 생각하면서 오히려 편안하고 조용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글은 살아있는 인생 현장의 삶이므로 그 어떤 것을 자극해 시를 쓰도록 마음이 꿈틀댄다고 한다.
실내는 닫혀있는 공간이라면 길은 영감을 주었으며, 시적 영감은 휴식 순간에 오는데 오히려 길에서는 편하게 자극을 한다고 고백했다. 그가 쓴 시는 고통을 겪는 인물과 혹은 동물은 불구적이고 연약한 자기 자신의 내면의 상관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시 중에 ‘The Hun chback(꼽추)’가 낭송될 때 전율을 느꼈다. 내 어릴 때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동생이 꼽추였었는데 어린 나의 눈에 비친 모습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해 무거운 것을 어떻게 매일 지고 다니나 하는 어린 마음에 불쌍해서 동정심이 일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성인이 된 후에 오히려 몸이 불구가 아니라 정신적 불구가 불쌍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안에는 무거운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비타민 D의 부족과 영양실조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잊고있던 일인데 김 시인을 통해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의 시에서 꼽추는 불구인데다가 노인이며 또한 걸인이니 생의 저 밑바닥에 더 이상 희망도 없는 삶의 끝자락에서 사는 처지이다. 정말 누구에게나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 눈에 띄지도 않는 그런 존재이다. 그는 이 시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적인 불구를 보여주는 고통이었고 치욕이 심해져서 극적으로 갈 때 즐거움으로 바뀌어지는 마술이 있다고 했다.
시 속에서 숙성이 되면 그것은 즐거움으로 바뀌어 병이나 상처를 바꿔주는 연금술이다. 현실이 부당하다고 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 현실을 바꾸어주지는 않지만 희망의 숨을 쉬게 해 준다는 것이다. 내면의 슬픔이나 괴로움이 시를 통해서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가 보이지 않는 고통이 있다. 그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아도 그것은 눈에 보여지는 가상이고, 실상은 아무도 모르며 오직 자신만이 아는 것이다. 시는 그런 어떤 꿈꾸기를 통해 숨통을 열어주는 매개체이다.
그는 시를 쓰고 난 후 몇 달에 걸쳐서 수없이 고치고 수정한 후에 탈고를 한다고 한다. 노력 없이 좀처럼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 시인의 강연을 통해서 시 쓰기를 하는 작업은 행복한 것이 아니겠는가 반문해봄과 동시에 사물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주의 깊게 모든 것을 바라보며 노력을 더 해야만 좋은 시가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반성해본다.
강연이 끝난 후 질의문답 시간에서는 외국인이 한국어로 질문을 하기도 했고, 많은 외국인이 한국 시인의 강연에 참석한 것을 보며 세계는 글로벌 시대 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강연을 준비하신 최병구 한국문화원 원장과 이 강연을 위해서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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