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한국도 미국도 아닌 제3국으로 처음 배낭여행을 갔었다. 여행 책자를 통해 현지 문화와 관습들을 공부하고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겪게 된 크고 작은 실수와 오해들은 ‘세상에 당연한 건 없구나’란 말을 실감하게 했다. 40여 년을 문제의식 없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며 살았던 것들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깨달음은, 다른 환경과 가치관에서 낳고 자란 사람과 내가 다른 당연함을 가질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과 마음의 유연성을 갖도록 해주었다.
상담 중에도 당연함의 잣대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며 그들의 당연함이 자신과 다르면 힘들어 하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여자가 집안 일 하는 거, 당연한거 아닌가요?” “힘들 때 가족이 위로해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밥을 몇 번 얻어 먹으면 한 번쯤은 사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요?” “남자가 일해서 돈 벌어오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학생이 지각 결석 안하고 학교 가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요?” 등은 내담자들에게 종종 듣는 당연함들의 몇 가지 예다. 그런데, 정말 이 당연함들이 모두에게 정말 당연한 일인가?
나의 당연함은 어린 시절 양육자의 가치관이 반영되고 주변 상황들에 반응하면서 내 안에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나의 가치기준이다. 이 당연함의 잣대를 다른 사람들에게 여과 없이 적용하며 판단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다. 그 동안의 상담 경험에 의하면 당연함의 잣대가 많고 마음의 유연성이 부족한 사람들이 더 많은 우울함과 좌절감을 겪는다.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사건을 보는 우리의 관점이다”라고 했다. 우리의 생각 혹은 신념체계를 바탕으로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자동적으로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당위적 사고 (should thoughts)’라고 한다. <출처 알버트 엘리스: 인지성격이론>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로 인간과 관련하여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나에게 기대하는 당위성 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친구, 직장 동료 등 가까운 타인에게 바라는 당위적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인간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되고, 이러한 불신감은 인간에 대한 회의를 낳아 결국 자기 비관이나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처럼 지속되는 당위적인 조건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흔히 이러한 당위적 조건을 기대하면서 그렇지 않은 경우에 화를 내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
당연함의 잣대가 위험한 이유는 또 있다. 당연함을 고집하는 것은 상대에게 나의 기대를 쌓는 일이다. 내가 만든 당연함을 상대가 따르지 않을 때 화가 나고, 상대를 바꾸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울함과 절망감을 경험한다.
‘힘들 때 가족이 서로 위로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위로가 없을 때 섭섭하고 화가 나서 잔소리와 불평을 한다. 그러나, 상대의 감정은 내가 요구할 수는 없는 남의 영역이기에,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 하면 할수록 좌절과 우울함을 경험한다. 그렇기에 잔소리가 심한 사람, 남을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은 더 자주, 더 큰 불안과 우울증을 경험한다.
또한, 당연함이 많을 때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상실하기 쉽다. 배우자가 가사 일을 도와줘도, 누군가 밥을 대접해도, 남편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해도, 만약 나의 기준이 당연함에 맞춰 있다면 내가 누리고 받고 있는 것들에 고마움을 느끼기가 어렵다. 고마운 마음과 삶의 감사 없이 마음에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니 마음의 유연성을 잃고 당연함의 감옥에 자신을 가둔다면 스스로 불행과 우울함을 자초하는 것이다. 당신을 화나게 하고 우울하게 하는 당신 안에 갖힌 그 당연함은 무엇인지, 오늘은 한번 딴지를 걸어 곱씹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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