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부가 돌아가셔서 한국엘 다녀왔다. 어머니 장례식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19년 만의 방문이었다. 오직 언니와 함께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여행계획도 없이 급하게 떠난 길이었다. 언니네로 도착한 이튿날, 오빠의 작은 아들 T가 찾아왔다. 아내와 형, 형수, 누나와 함께 온 T는 내가 아주 미워하던, 다시는 만날 일이 추호도 없으리라 여겼던 조카였기에 그의 방문에는 적이 놀랐다. 게다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내마저 동반했으니. 그들에게서 절을 받으며 나는 미운 마음 잠시 접어두고 모두를 반갑게 맞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조카의 방문이 반갑고 고마웠다. 자기를 미워하는 고모와의 만남은 결코 쉬운 발걸음이 아니었을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이자 T의 할머니가 오빠네 댁에서 머물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이곳에서 13년을 우리와 함께 사시던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으로 가시겠다 하셨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듯하다. 아들이 있는 한국에서 죽어야지!”
딸은 결국 딸일 뿐 이고나 하는 서러움도 있었지만, 마지막 염원을 거절하지 못하여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그런데 어머니가 밤중에 울먹이면서 전화를 해오셨다. 오빠네 댁으로 가신지 이주일 만이었다.
“나 미국으로 다시 가련다. T가 자꾸만 ‘할머니, 여기 누가 오라고 해서 왔어? 미국으로 다시 가요, 다시 가!’ 하니 나 데리러 와다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T가 수화기를 바꿔 받자 예전엔 써보지 못한 욕부터 나왔다. “야, 너도 인간이냐? 너 지금 배불리 먹고 잘사는 게 누구 덕분인 줄 알아? 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뼈 빠지게 고생하면서 일군 거야. 이 개만도 못한 XX 아 …” 실컷 욕을 퍼부었지만, 울분은 가라앉지 않았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튿날 어머니는 결국 언니가 모셔갔다.
그로부터 나에겐 지독한 미움이 생겼다. T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부르르 치가 떨렸고 위가 쓰렸다. 같은 피가 섞였다는 것조차 부끄러웠고,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돼버렸다. 하지만 소식은 계속 전해졌다. 경찰관이 되었다느니, 어느 귀한 집의 예쁜 딸과 결혼했다느니, 진급이 척척 잘 되어서 아주 잘산다느니 … 하지만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이라야 사람이지’를 되뇌게 할 뿐 미움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 고국 방문에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겼다. 하루는 그의 아내와 쇼핑을 하게 되었고 훌륭한 점심도 대접받았다. 그녀는 다정했고 겸손하였으며 극진히 배려해주는 마음이 곱고 기특했다. 떠나오기 바로 전날엔 근사한 호텔에서 나를 위한 송별 만찬에 사 남매가 모두 참석했다. T가 주선한 모임이었고 식사비도 그가 챙긴 것이었다. 식사 후에 그의 아내가 건네준 선물 또한 나를 위한 배려와 정성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곳으로 돌아온 후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고맙다는 이메일을 그에게 보냈다. 그의 아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화로 전했다. T를 미워하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용서와 이해로 바뀌는 듯하였다. 예기치 못했던 T의 방문이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했다면 그의 아내가 들려준 “많이 후회하고 반성하며 살아요.”라는 말이 굳게 닫혀있던 나의 마음을 열게 했나 보다.
2015년의 첫 달엔 거창한 신년의 각오 대신에 소박한 소망을 해본다. ‘건강한 날들,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채우는 한 해이기를 …’ 가슴에 맺힌 지난 20년 동안의 아픈 응어리가 녹아나며 따스해지는 건, 기필코 샌디에고의 따스한 햇볕 때문만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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