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좋아 백화점이나 대형 수퍼에 가면 예쁜 옷, 편리한 생활용품, 산더미처럼 진열되어 있는 채소와 과일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모두를 다 사고 싶은 유혹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다. 나는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갖지 않으려는 편이다.
나는 중, 고교생 시절에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식구들에 대해 미안해하며 눈치만 보는 그분을 보면서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지금은 내 가족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가능한 절약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어쩌다가 필요해서 산 물건이 소용이 없을 경우 나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준다. 그런 경우가 자주 있다 보니 아내의 핀잔을 받는 경우도 가끔 있다.
이런 나에게도 남에게 주지 못하고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오래 전 영국에 살 때, 유럽 각국을 여행하며 모아 두었던 아름다운 명곡들이 담겨 있는 음악 카세트 테이프들이다. 자그마치 700여개를 영국에서 미국으로 배로 부쳤는데 소포를 받아보니 200여개의 테이프가 분실되어 있었다. 그때의 절망감이란... 그 중에는 내가 아끼던 스페인의 오페라 가수인 로스 데 안젤로스가 부른 ‘마담 버터플라이’, 로드리고스의 기타 연주곡인 ‘라 플라야’를 비롯한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CD로 바뀌어진 후에도 이 테이프들을 듣고 싶어서 조그만 휴대용 축음기를 사다가 예전 함께 일했던 친구들이 생각나면 이 곡들을 듣곤 했다. 쓰지도 못하는 물건을 집 안에 쌓아 놓고만 있느냐는 아내의 핀잔에 내다버려볼까하고 시도를 해 보지만, 남은 음악 테이프들이 내 인생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죽을 때까지 함께 가져가기로 했다.
또 하나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 40년가량이나 되는 펜탁스 카메라이다. 이 카메라를 보면 떠오르는 과거의 일들이 많다. 이 카메라로 찍은 막내의 4살 때 진해 시민회관의 동화대회에서 동화를 읊던 순진하고 해맑은 모습과 지나온 세월 따라 찍었던 가족의 단란했던 모습들을 이 카메라가 사진으로 남겨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평생을, 아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 하나 있다. 내가 고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장티프스에 걸려 고열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나의 어머님은 힘든 가계를 돕고자 삯바느질을 하셨는데,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밤을 낮처럼 여기고 일하시며 하루 종일 나의 병상을 지키고 계셨다. 때로는 피로에 지쳐 손가락을 바늘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 눈물지으시던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던 이야기가 있었다. 조선의 명필 한석봉의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다. 호롱불을 꺼놓고 어둠 속에서 한석봉과 어머니가 붓글씨 쓰기와 가래떡 썰기 시합을 했다. 결과는 자로 잰 듯 가래떡을 자른 어머니의 승리였다. 이후 한석봉은 대오 각성하여 당대 최고의 서예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나의 어머니의 눈빛은 첩첩산중에 내린 어둠을 걷어내는 맑은 달빛이었고, 어머님은 지극한 사랑으로 죽음의 계곡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신 그런 훌륭한 분이셨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테이프들, 가족들의 추억을 간직하게 해준 오래된 카메라, 그리고 평생토록 은혜를 갚으려 해도 갚지 못했던 나의 어머님의 가이없는 사랑은 영원히 간직해야할 가장 소중한 나의 보물이다.
● 주 : 지난 3월 4일자 오피니언에 게재된 ‘봉선화와 쉰들러의 주제곡’ 글에 소개된 ‘봉선화’의 작곡가는 현제명 선생이 아닌 홍난파 선생님으로 바로 잡습니다. 홍난파 선생님의 가족과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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