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탄신 470주년 임진왜란 423주년 오랜 세월 속에서도 더욱 그리워지는 추모의 정과 함께 나라의 어려움이 있을 땐 새삼 공의 리더십과 구국의 애국정신을 반추해 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순신은 청빈한 양반가문에서 이정의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충청도 아산에서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선천적으로 뛰어난 인품과 함께 씩씩한 기상으로 남에게 구애 받지 않는 정의로운 지도자의 자질로 태어났다. 순신은 32세 때 무과에 급제 첫 군관생활을 함으로써 대기만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강직한 그의 성격은 상사의 비리 청탁이나 명령은 거절함으로써 이로 인한 갈등은 불이익으로 연결되어 좌천과 파직 백의종군으로 파란만장한 군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솔선수범과 함께 올바른 처신은 부하에겐 신상필벌의 엄격한 원칙과 어려운 부하에겐 위로와 격려는 물론 가족같이 보살피는 따뜻한 정이 있었다.
당시 당쟁으로 여념 없던 조정은 일 침략을 부정하는 가운데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관된 순신은 유비무환의 각오로 전쟁준비에 만전을 다 하여 연전연승의 공으로 1593년 3도 수군통제사로 승진 되었으며 그는 포와 화학무기로 무장한 거북선과 판옥선을 창제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과시 했다.
또한 그의 승전은 투철한 애국 애족심과 뛰어난 리더십을 바탕으로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의 굳센 신념과 지피지기 백전백승(知被知己 百戰不敗) 이보전진(二步 前進) 위한 일보후퇴(一步後退) 학익진법에 의한 절술은 세계전사에 없는 23전23승의 전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조정의 도움 없는 사정에서 둔전과 해산물 수확으로 군량미와 전비를 자급자족으로 충당하였고 장군만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피난민에겐 땅을 개척 영농케 하는 등 이들의 보호와 생계에 이르기 까지 노력을 다하였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한산도 해전에서 학익진법으로 적선 70여 척을 불살라 격퇴했으며 그 후 명량해전에선 패잔선 12척으로 10배가 넘는 133척 중 왜선 31척을 파멸시킨 전과는 전세계 해전에서 없었던 대승첩을 이뤘다. 이와 같이 제해권을 완전 장악한 조선 수군은 적의 바다를 통한 상륙과 군수품 수송을 차단 봉쇄함으로써 왜적에 막대한 치명적 타격을 주어 전세를 바꾸게 했다.
충무공은 명장 이전에 극진한 효자로서 그 위에 지혜와 용기, 덕을 겸비한 원만한 인격자로서 문학과 시조에 이르기까지 높은 소양을 갖추었으며 완고한 봉건사회에서 민주적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선견지명도 있었다. 명나라 제독 진인은 이순신은 천하를 다스릴 능력이 있다고 높이 평가 했고, 일본학자 조이치로는 순신은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겼다고 하였고, 또한 순신이 영국의 넬슨보다 더 위대한 것은 넬슨은 정부에서 모든 군수품을 후원했지만 순신은 도움 없이 자급자족으로 군량과 군수품을 만들었다고 했다.
어쨌든 비록 장군은 54세의 짧은 생애로 순절 하였지만 역사상 불세출의 명장으로서 영원한 구국 성웅으로서 온 겨레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존경 받는 대상이 되리라 믿으면서 오늘날 한국의 지정학적 정세와 위기의 해법은 이순신의 리더십과 임란의 교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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