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깨는 5월은 얼마나 아름다운 계절인가. 목마른 나무들의 푸른 혁명이 날이 갈수록 초록을 더해간다.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 가는 나뭇잎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공연히 눈물겨워진다. 해마다 봄은 다시 오건만 인생의 봄은 어찌해 다시 살아볼 수 없는 것인가. 세상은 자고 나면 이변과 재난과 폭동으로 내일 일을 알 수 없어 불안한 중에도 자연은 우리에게 푸르디 푸른 위안으로 다가온다.
해가 길어져서 일광절약시간으로 바뀌던 날 밤 자정 이었던가 보다. 잠결에 어디선가 뻐꾸기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 보니 거실에서 나는 뻐꾸기시계 소리였다. 전날 밤,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 놓으려고 거실에 있는 벽시계를 보니 언제부터였는지 시간이 정지된 채였다.
오랜만에 배터리를 새로 갈아 넣은 후 잠들었는데 뻐꾸기 시계가 오랜만에 시간을 알리는 소리다. 오래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동생이 선물한 것인데, 처음 한 동안은 시간의 숫자대로 뻐꾸기소리가 잘 들렸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뻐꾸기 소리를 세어보면 시간을 알 수 있었고 “뻐꾹 뻐꾹” 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마치 어느 산장에 와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뻐꾸기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더니 시간 마저 멈춘 채 거실의 장식물이 된 것이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던 차에 뻐꾸기소리를 들으니 마치 고향의 봄이 내 거실에 찾아온 듯 반갑고 기쁘다.
미국에서 살게 된 지 2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 어린 시절, 고향에는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꽃들이 피고 질 것만 같다. 마을 언덕에 배꽃이 바람결에 하얗게 낙화하던 유년의 봄 풍경이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 되어 더욱 그립다. 봄이 오면 산천은 다시 푸를 대로 푸르고 새들은 저희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음표로 지저귀는데 나만 홀로 저물어가는 것 같다.
사람도 사물도 나와의 인연이나 못 잊을 사연에 따라 그 의미가 사뭇 다른 것을 이국에 살면서 더 절실히 느낀다. 나는 제아무리 아름다운 새소리보다 뻐꾸기 소리가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 쉰 다섯 살 푸른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산에 묻고 오던 날, 하루아침에 과부가 된 어머니, 울음을 삼키며 아버지 무덤을 돌아서는 등뒤에서 피 울음 울어주던 그날의 뻐꾸기 소리를 어이 잊으리. 돌아가신 직후에는 비가 내리면 무덤 속의 아버지가 젖을까봐 내 마음이 먼저 젖곤 했다.
세월이 사람을 무정하게 하는가. 이제 내 나이 아버지 돌아가신 해의 어머니 연세보다 십 년을 더 살았다. 작년 5월 이맘때 모처럼 한국을 방문했다. 화창한 봄날에 6남매가 함께 여든 네 살 이신 어머니를 모시고 소풍을 가듯 아버지 산소엘 갔다. 번화한 서울거리를 벗어나 양수리 강변을 지나니 산천은 푸를 대로 푸르고 산소 입구에 이르자 깊은 산속 여기저기서 뻐꾸기들이 우리식구들을 어서 오라고 합창을 한다. 뻐꾹, 뻐꾹, 뻑 뻐꾹…… 새는 같은 소리로 지저귀는데 어떤 때는 우는 것 같고 또 어떤 때는 노래하는 것 같으니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일으키는 다른 생각이리라. 해마다 아버지 돌아가신 날의 해질 무렵이면, 5월의 청산에서 울던 뻐꾸기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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