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 짚은 이 동양신사의 사진은 1955년 이곳을 방문한 일본의 외무장관 겸 총리대리였던 마모루 시게밋쭈이고 옆에 있는 여자는 그의 딸 하나코입니다. 마모루는 이차대전 당시 상해에서 일본 침략에 저항하던 사람이 던진 폭탄에 오른쪽 다리를 잃어 의족에다 지팡이를 하고 여기 왔었습니다.”
미국에서 산 나이가 한국에서 살았던 나이를 훌쩍 넘었으니 우리도 미제 온천을 한번 가 보자하고 버지니아 산골 핫스프링스 휴양지에 갔을 때 거기서 관광을 50년째 맡고 있는 노련한 역사가(?)가 벽 한구석에 붙은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했던 소리다.
마모루 시게밋쭈! 언젠가 어디선가 들은 이름 같다. 낯익다. 어디서 언제….? 일본 저항군이 던진 폭탄…. 의족에 지팡이…. 혹시…. 맞다. 바로 그 사람이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맞아 다리 하나를 잃어버린 사람, 그래서 의족에 지팡이 짚고 다녔다는 사람, 지팡이 짚고 맥아더 장군 앞에서 일본의 항복문서에 싸인했던 바로 그 사람. 그 사람이 마모루 시게밋쭈였구나!
그러고 보니 일본이 미국 군함 선상서 항복식(?) 하던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미국 전함 미조리 호의 갑판, 차렷 자세로 늘어서 있던 미국 해군들, 재킷도 없이 셔츠 바람으로 서 있었던 맥아더 장군. 일본 대표단을 거느리고 맥아더 장군 앞에 섰던 검정 연미복에 굴뚝모자 쓰고 지팡이 든 사람. 이 사람의 싸인과 더불어 일본의 항복과 패전은 문서화 되었고 우리나라의 독립도 역사의 문서가 된 셈이다.
내가 머리가 좋아, 아니면 기억력이 좋아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차대전의 종지부가 찍히고, 일본이 전쟁에 패했으며,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증명, 인증하는 사진이었기에, 그리고 그 장면이 배의 갑판 (당시는 그 배가 어떤 배인지, 무슨 배인지, 이름이 있는지조차 몰랐지만.)에 늘어선 미군들의 주시 하에, 맥아더 장군의 주도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던 때문이다. 사진을 언제 보았던지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그 사진을 본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은 나처럼 그 장면을 잊지 못하리라.
싸인 하러 나온 사람이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다리를 잃었고, 바로 그가 일본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싸인 한 줄도 몰랐었다.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해의 기념 식상에서 폭탄 던진 것이 올 4월 29일로 83년이다. 그때 윤봉길의 나이 25세. 뭐라 말하랴?
“시게밋쭈 총리대리는 패전 후 일본을 재건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로부터 돈은 꾸려고 왔다가 여기 들렸습니다. 보시다시피 이곳은 22명의 미국 현직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외국 저명인사들도 다녀갔지요.” 노련한 역사가(?)는 계속했다.
“바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다리 잃은 사람이야.” 남편이 내 귀에 대고 말한다. “그러게 말예요. 그 사람이 총리대리였나 보네요.”
50년째 관광 안내하고 있는 사람은 시게밋쭈가 이곳을 다녀간 일본의 총리대리였음엔 관심이 크지만 왜, 누가 던진 폭탄에 다리를 잃었던 가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시게밋쭈야 아픈 다리를 온천에 담가보고 싶어 찾아왔겠지.
찾아보니까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장군 하나는 죽고 다친 사람이 여럿인데 시게밋쭈는 그중 하나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다. 시게밋쭈는 일본에서 몇 안 되는 반전주의자로 일본이 하와이 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정계, 외교계에서 밀려나야 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야 총리대리가 되었고 맥아더 앞에서 싸인 하는 사람으로 되었을지 모르지.
상상해 본다. 혹 윤봉길 의사의 혼이 있다면 전함 미조리호 갑판 위를 날아다니며 한마디 하고 싶지 않았을까? “여보게 시게밋쭈, 그래도 내가 당신 다리 하나는 남겨 주었으니 고마운 줄 아시오. 오늘 이 자리에 당신이 지팡이 짚고 고개 숙인 채 나와 싸인 하는 것이 그나마 다른 놈보다는 내 분통이 조금은 풀릴 것 아니겠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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