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얼핏 보면 단순히 언변(言辯)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속담 같지만, 기실 듣는 사람의 감정과 처지를 고려한 진심과 배려를 담은 말의 힘을 뜻하는 속담일 것이다. 진심을 담은 사과의 말 역시 천 냥 보다 더 무거운 마음의 아픔이나 구원(舊怨)을 사라지게 한다.
지난 4월말을 전후하여 고국과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키워드는 단연 사과(謝過, apology)였다. 미국을 방문한 일본 총리의 입에서 사과를 고대하였지만, 그는 미국에 대하여만 사과 하였을 뿐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하여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사과를 외면하였다.
한편에서는 일본에게 사과를 받아내려는 태도를 이미 지난 과거사에 대한 집착으로 보며 마뜩잖아 하는 이들도 있다. 또는 현실을 직시하여 과거사 문제와 현재의 관심사들을 분리하자는 현실론적 주장이나 과거불문하고 국익에 따라 일본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실용적 입장도 있다. 이는 사과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며 주체적 삶이 아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것은 개인이나 국가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대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사과를 힘들어 한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시인하기 힘들어 사과를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 혹은 사과를 하면 이에 따라 오는 사회적 책임이나 경제적 보상에 대한 부담 때문에 사과를 주저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잘못을 했다면 가해자는 자존심이나 내면의 심리적 저항, 혹은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용기를 내서 상처를 준 사람에게 반드시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과는 더 좋은 인간관계, 더 올바른 국제사회를 위한 사회적 행동이다.
어떤 사람은 이미 지난 일에 대하여 자꾸 사과를 요구한들 뭐 달라질게 있느냐고 한다. 더 이상 문제 삼지 말고, 과거를 덮고 앞으로 가자고 한다. 사과를 과거지사(過去之事)로 바라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사과는 이미 지나간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과거의 실수나 역사적 과오에 대한 현재적(現在的) 반성과 시인(是認)을 요구하는 것이다.
진정성 있는 사과는 이미 지나간 가해자의 과오와 그 상처로 인하여 생긴 피해자의 현재적 아픔과의 만남이다. 이 만남이 있어야 화해가 이루어지고, 치유가 일어나며, 둘 사이에 다시 신뢰가 형성된다. 화해와 신뢰 없이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 점에서 사과는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사과는 소모적이고 답답한 과거지사가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생산적이며 적극적인 미래지사(未來之事)다. 우리는 과거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용기 있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연 , 진정한 사과의 모범을 1970년 폴란드의 무명용사 묘비 앞에서 덥석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독일 수상에게서 본다. 화해와 치유 그리고 유럽의 새로운 미래가 열린 순간이었다.
일본처럼 가해자의 양심이나 도덕성에 호소해 보아도 사과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개인 사이에도 그런 사람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해자를 끝내 사과로 불러내는 길 혹은 사과가 없어도 넉넉하게 용서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그것은 피해자 스스로 자기극복(自己克復)을 이루는 길이다.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스스로 상처를 딛고 아픔에서 일어서는 일이다. 상처를 더 큰 자기발전의 계기로 만드는 일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자기극복을 통하여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용서한 요셉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50:20)
가해자의 잘못을 잊지 않고 분명히 하되, 자기극복을 통하여 내면을 치유하고, 미래를 열어갈 힘과 비전을 길러야 한다. 상처받은 자의 당당한 ‘자기극복’이야말로 사과에 기대지 않고도,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게 하면서 다시 새로운 관계,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게 하는 길이다. 자기극복의 자리에 설 때 사과와 용서와 화해는 서로 만나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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