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구리 잡았다. 너구리! 빨리 나와 봐!” 삼촌이 지르는 고함소리에 우리 형제들은 눈을 비비며 마당으로 모였다.
마당 한가운데 쳐 있는 그물 속엔 너구리 한 마리가 쭈그리고 있다. 빙 둘러선 인간들을 살피는 두 눈에 겁이 가득하다. 닭 서리, 토끼 서리 하는 놈이라 몸집도 배짱도 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작고 불쌍해 보인다. 녀석의 심장은 100미터 질주한 인간보다 열 배는 빨리 뛰겠지.
60년대, 우리는 이화여대와 연세대 사이에 낀 대신동에 살았다. 지금사 그린벨트 어쩌고 하는 통에 숲이 많지만, 그때는 어디 가나 민둥산이었다. 우리 동네만 연대와 이대 덕에 나무와 풀이 좀 남아 있어 다람쥐도 가끔은 볼 수 있었다. 먹을게 궁해 나무껍질에다 뱀까지 씨를 말리던 시절 아니던가?
가난한 선생 아버진 배싹 마른 아이들이 그래도 가끔 고기 한 점씩은 먹어야 할 텐데 싶었나 보다. 백수였던 막냇동생한테 동물을 키워보라 의논했다. 날라리 끼가 많았던 막내 삼촌은 공부와는 등졌어도 동물 키우는 일엔 둘째가라면 서운할 젊은이였다. 덕분에 손바닥보다 조금 컸던 우리 마당엔 인간 식구들 사이에 인간 아닌 동물 식구, 즉 토끼, 닭, 염소 등등이 늘 우글거렸다. 21세기 오늘 본다면 오만가지 법에 다 걸리고 “야, 저기가 사람 사는 곳이야 아니면 동물원이야?” 하리라.
그 시절, 어쩌다 운 좋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야생 너구리 한 마리가 밤이면 우리집에 밤손님으로 와서는 닭이나 토끼를 한 마리씩 드시곤 했다. 우리야 너구리가 식사했는지 호랑이(?)의 짓인지 알 수 없지만 삼촌 말에 의하면 너구리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너구리가….? 삼촌이 잘못 짚었지.” 우리는 키득거렸다.
동물 키우는 일이라면 삼촌을 능가할 사람 없다. 우리처럼 너구리도 삼촌의 능력을 얕보았던 모양이다. 삼촌이 쳐 놓은 덫에 잡힌 거다.
그런데 그놈의 잡힌 너구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아무리 고깃점이 그리워도 녀석을 잡아먹자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우선 진동하는 고얀 냄새가 구미를 끌기엔 아니올시다였으니까. 그렇다고 풀어 주면 다시 토끼서리하러 오지 말란 법 없질 않겠는가? 그렇다고 죽이자니 그것도 토끼 잡아먹은 죗값 치곤 너무한 듯하고.
인간 식구들은 머리 맞대고 답 없는 토론을 거듭했다. 동물 너구리는 무엇에 심사가 삐쳤는지 계속 단식투쟁(?)만을 고집하고. 자기도 먹고살겠다고 높은 담 넘어 토끼서리까지 왔던 녀석이 말이다.
“동물원으로 보내자”로 사흘 만에 투표가 일단났고 그일 역시 막내 삼촌 몫이었다.
그런데 동물원으로 데리고 가기로 한 날 너구리는 죽어버렸다. 사람 근처라면 야심에도 살살 숨어만 살던 녀석이 갑자기 인간사에 들어와 마당 한가운데 꿇어(?)앉아 눈칫밥으로 연명하기가 영 조련치 않았던 모양이다.
서울시 대신동에 있는 우리 집을 침입했던 너구리가 죽은 지 올해로 50년.
오늘의 나는 대신동 아닌 미국의 고층 아파트에 산다. 여긴 날아다니는 새가 흘끔흘끔 날 구경 할지는 몰라도 너구리, 사슴, 토끼 따위는 저 아래 땅 위의 문제이니 상관없다.
허공에 붕 뜬 베란다에 바닷가에 놓는 의자 하나 내다 놓고 길게 누워 반세기 전 너구리 이야길 구시렁거리며 폼잡아 본다.
너구리까지 잡아가면서라도 먹어야 산다고 굳게 믿었던 고기는 보약보다는 독약(?)에 가까우니 그만 먹으란다.
그 말 믿는 나는 우아하게(?) 아이스티 잔을 손에 들고 있다. 유리잔은 나 대신 이 무더위에 땀을 줄줄 흘리고.
50년전? 우리가 진짜 너구리를 잡았었나? 혹 더위 먹고 꾼 꿈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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