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은 미국의 대표적 진보경제학자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스 기고와 저술 등을 통해 자신의 진보적 생각을 개진해 오고 있다. 시장의 자율적 기능에 회의적인 그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한다. 그런 생각은 자연히 정부가 소득 재분배 정책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공화당 대선 레이스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는 성향이나 배경으로 볼 때 완전히 크루그먼과 대척점에 서 있다. 상식을 무시하는 망언들을 마구 쏟아 내는 억만장자 트럼프는 크루그먼 입장에서 결코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크루그먼이 트럼프의 경제정책을 옹호하고 나서 화제가 되고 있다. 트럼프는 이민 등에서는 극우적인 색채를 드러내지만 경제 정책에서는 공화당 주류와는 다소 다른 입장을 표명해 왔다. 그는 헤지펀드와 수퍼리치들에 대해 증세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또 한 인터뷰에서는 단일세보다 누진세가 정당하다는, 민주당 입장에 가까운 생각을 털어 놓기도 했다.
트럼프의 이런 입장이 다른 공화당 주자들의 공격을 받자 크루그먼이 엄호에 나선 것이다. 그는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트럼프가 보수진영 주류와 달리 시대 변화를 가장 잘 읽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공화당 지지자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이런 입장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억만장자여서 거액 기부자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크루그먼이 트럼프를 옹호했다고 해서 그를 대통령 후보감으로 여기고 있다고 본다면 오산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금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런 ‘과감한’ 주장을 펼 수 있다는 분석은 시사적이다.
정치를 좌우하는 것은 ‘돈’과 ‘표’이다. 특히 정치와 미디어의 환경이 급속히 바뀌면서 정치인들은 돈 없이 표를 모으는 게 과거처럼 쉽지 않게 됐다. 미국정치의 폐해를 지적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는 ‘금권정치’이다. 돈이 미디어의 영향력을 좌우하면서 정치는 부자들을 위한 ‘절차적 도구’로 전락해 왔다. 그러니 정치인들로서는 거액을 기부하는 부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의 경우처럼 정치인들이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소신을 펼치기 한결 수월할 것이다. 돈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은 줄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미국정치의 가장 시급한 개혁 과제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 다만 이미 권력을 쥔 지도자라면 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 졌다고 볼 수 있다. 미중 수교와 사회보장 개혁 등 미 역사에 기록될 굵직한 조치와 결단들은 표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던, ‘진영 논리를 뛰어 넘은’ 대통령들에 의해 이뤄졌다. 표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역사를 위한 정치를 펼 수 있게 됐음에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진영논리에 얽매여 있는 권력자들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