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제 2차 세계대전이 미 러시아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후 나치 독일과 제국 일본의 지배를 받은 국가들 중 프랑스에서는 나치 부역자 청산 문제에 있어서 레지스탕스 출신의 국민적 추앙을 받은 노벨상 수상자인 모리아크와 알베르 카뮈의 부역자 청산에 대한 각각의 생각이 크게 달랐다. 카뮈는 부역자 처벌을 강력히 주장한 반면 모리아크는 부역자들에 대해 관용을 호소했다. 한계 상황 속에서 저지른 과오는 불가피한 처지에서 발생된 비자발적 처사였으므로 관용해야 한다고 인간애를 주장했다.
국민의 여론을 업고 진행된 청산작업의 결과는 사형 1만 명, 징역형이 10여만 명 이었다. 인간성 내면의 성찰 없이 집단적인 광기로 이성을 잃고 나치 부역자 청산의 구호아래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참상을 지켜보면서 공의롭지 못한 청산행위에 깊이 반성한 카뮈는 탄식하며 “모리아크가 옳았다”고 자신의 과오에 대해 참회를 하고 비이성적 집단의 폭력성에 대해 더 이상의 청산을 중지할 것을 대중에게 호소하며 양심선언을 했다.
2차 대전 종료 후 중국의 친일 부역자 청산은 어떠했을까. 중국의 장개석 정부는 10만 명이 넘는 수많은 민족 반역자 한간(漢奸: 친일 협력자)들을 처단했다. 장개석은 한간 문제만은 완강했다. 장개석이 무자비하게 양인과 한간을 잘 구별하지도 않고 속전속결로 군부에서 잡아들이는 대로 처단한 것은 장개석 정부 내의 군부와 부인인 송미령 일당의 부정부패를 눈가림하기 위해서였다.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 가고 새 정부인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한간 문제만은 완강했다. 이 때 주작인을 구해준 사람이 부수상이자 지식인 주은래였다. 주은래는 그의 죄는 괘씸하나, 과거 그가 기여한 일본 고전 번역 등의 업적을 고려해서 사면하고 고전 번역에 종사하도록 해주었다.
한국에서는 ‘한간’에 해당되는 말이 ‘친일’이다. 중국은 2차 대전 종료 후 즉시 친일 부역자들을 처벌하였지만 옥석을 가려 불가항력적인 비자발적 친일은 사면해 주었다. 대한한국은 어떠했을까. 해방 직후에 이승만 정부는 친일 부역자를 청산하자는 논의가 1948년 8월15일 까지 3년 동안 없었다. 그해 11월에서야 특별재판관에 김병로(전 대법원장)를 임명하여 반민특위를 발족하고 총독부 고위 관계자를 비롯하여 전쟁협력인사들, 문필가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다. 유창한 문장으로 황도선양을 고취한 친일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도 이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재판정에서 최남선과 이광수는 조국을 위한 충정만은 불변하며 변절과 친일에 부역한 것을 참회한다고 전했다.
춘원과 육당은 운이 좋았다. 반민특위 위원장인 김상덕이 골수 친일파로 판명이 되어 특위가 해체되어 1949년 3월 4일에 출옥했다. 그 당시 치죄해야할 친일파가 얼마나 많았는지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는 역사가들의 증언이다.
요즈음 신문 기사를 보면 이명박 정부 때 만들어진 국정원 댓글 사건과 72년이나 지난 친일 부역자의 자손이 소유한 재산환수 문제가 뜨겁게 부각되고 있다. 과거사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잘못된 과거 청산을 위해 과거사를 새롭게 들추어내어 단죄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국민 화합적 차원에서 정치보복이나 권력쟁탈 같은 프레임으로 고착되지 않도록 고심해야 할 것이다.
<
대니얼 김 그린벨트, MD>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