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전시 중 런던의 워털루 브리지 다리에서 발레리나인 비비안 리와 육군 장교인 로버트 테일러가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을 한다. 비비안과 로버트는 사랑의 나날 속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만 행복의 시간은 잠깐 동안만 이었다. 로버트가 전장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 왔다. 비비안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은으로 만든 십자가 마스코트를 로버트의 손에 쥐어주며 꼭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다리겠다고 사랑하는 연인에게 굳게 약속을 한다.
로버트는 전장으로 떠나고 혼자 남은 비비안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며 살아간다. 그런 어느 날, 비비안은 신문에서 로버트의 사망 소식을 읽고 혼절한다. 사실은 동명이인 이었는데. 그녀는 매일을 쪽방 한 구석의 침대에 누워 로버트를 그리면서 지독한 슬픔 속에서 보냈다. 해가 바뀌어 로버트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절망하고, 자포자기한 그녀는 발레리나 친구의 권유로 친구를 따라 몸을 팔고 만다. 종전이 되어 돌아오는 병사들을 유혹하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하고 역에 나간 비비안은 뜻밖에 로버트를 만난다. 두 사람은 너무 기뻐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워털루 역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서 마주 앉는다. 로버트가 우리 오늘 당장 결혼하자고 하면서 전쟁터에서도 소중히 간직했던 십자가 마스코트를 비비안의 손에 쥐어준다. 비비안은 대답대신에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없이 일어서서 그를 떠난다. 로버트가 애타게 비비안을 부르며 그녀의 뒤를 쫓아간다. 비비안은 달려오는 군용트럭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그녀의 핸드백에서 십자가 마스코트가 튀어나와 아스팔트 길 위에 나뒹군다. 마스코트를 손에 쥔 로버트는 심장이 터질 듯한 슬픔을 안고 안개 낀 워털루 브리지를 걸어간다. 영국의 명화 ‘애수(哀愁)’의 이야기다.
비비안이 힘든 삶의 고통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소망은 연인 로버트와 맺은 영원한 사랑의 약속인데, 살아 남기위해 저지른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죄책감으로 비비안을 자살하게 만든 영화의 슬픈 귀결이 못내 아쉬웠다.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로버트의 모습을 그렸더라면, 이 영화가 더욱 승화된 미적 감동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애수’는 연인의 비극적인 이별로 감동을 주었지만, 인간사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약속을 성취한 사람의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다.
중세 폴란드의 왕 에릭은 심복인 바사공작을 반혁명 분자로 몰아 종신형에 처했다. 남편의 종신형에 큰 충격을 받은 바사의 아내 카타리나는 왕을 찾아가 간청을 했다. “폐하, 저는 제 남편과 한날한시에 죽기로 약속한 몸이니 저도 남편과 함께 복역하게 해주십시오.” 왕은 그녀의 청을 거절했다. 카타리나는 어떠한 어려움도 감당할 수가 있다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정표인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내 왕에게 보였다. 반지에는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의 약속’이라는 뜻인 ‘모르스 솔라(Mors sola)’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카타리나는 남편과 함께 17년 동안 행복한 감옥생활을 했다.
현실에서는 갚아야 할 경제적인, 인간적인 은원(恩怨)의 빚으로 인한 약속들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 약속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계산하고 따지지 말고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살면 어떨까. 때로는 손해가 될지라도 주고 싶은 대로 주면서 그렇게 살아가면 어떨까. 자유롭게 숨을 쉬며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라고 여기고 살면 어떨까. 우리 모두가 아무런 약속의 부담 없이 서로 믿으며, 손에 손을 꼭 잡고 사랑을 나누며 가파른 인생의 산을 넘어가보면 어떨까. 그리고 그 건너편에 끝이 없이 펼쳐진 가을 밤하늘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처럼 우아하고, 평화롭고, 약속이 필요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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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김 그린벨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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