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한잔의 초대 /허낭자 전 아콜라한국문화학교 교장
주중엔 재정전문가로 주말엔 한국학교 교장으로 동분서주
틈틈이 배운 전통매듭으로 개인전도 열어
은퇴후에도 끊임없는 자기개발...12월엔 하프연주회까지
▲한국학교 봉사 큰 보람
평일에는 미국 유수의 직장에서 재정전문가로 일하고 주말이면 한국학교에서 봉사해 온 전 아콜라한국문화학교 교장 허낭자,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참 부지런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지난 6월로 모든 것에서 은퇴했다.
직장, 한국학교, 교회로부터 모든 것을내려놓았다. 그런데 왜 이리 바쁜지, 매일 스케줄이 있다.”고 밝게 웃는 그는지난 4월 아콜라교회 시무장로에서원로장로가 되고 6월에는 22년간 봉사해온 한국학교 교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허낭자는“ 1990년대초에 아콜라 교회에서 선데이 스쿨을 열어 한국어를한시간씩 가르치고 있었다. 교회 자체건물을 건축하면서 교실이 많이 생겼고 당시 최효섭 담임목사의 권유로 한국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콜라한국문화학교 이름에 문화란 단어가 들어간 것은 미국에서 한국어만 가르쳐서는 안되고 음악, 역사, 한국 문화도같이 가르쳐야 한다는 목사님 뜻이 반영되었다.”고 알려준다.
뉴저지주 파라무스에 소재한 아콜라한국문화학교는 95년 2월28일 개교했고 한국어, 한국문화와 역사, 태권도, 음악, 서예를 초창기부터 가르치기시작했다.
“94년에 이사회 조직을 했고 미국내는 물론 한국에서도 이력서를 받아교사를 뽑았다. 한국학교는 교사가 아주 중요하다. 출발 시에 학생 110명으로 시작했고 현재 교사 20명이상, 학생 160명 정도가 공부하고 있다. 후세들을 위한 한국학교 봉사 활동을 한것이 내 삶에 가장 기뻤고 보람이었다.”
▲아콜라 한국문화학교
“교사들은 미주 수요일마다 교안작성을 하여 교장에게 보내고 검토 받게했다. 여러 교사수련회에 교사들을 참가시키고 한국학교 커리큘럼과 다양한 학습 자료들을 개발해 사용했다.”매학기 문집발행, 발표회 등으로 다양한 학습을 실행한 결과 아콜라 한국문화학교는 뉴저지 최고 수준의 학교 중 하나가 되었다.
“1.5세, 2세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문화를 알려 주체성을 갖고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써 한인사회와 미 주류사회 어디서나 잘 적응하고 봉사하는 인재가 되게 하자는데 목표를 두었다.”특히 그는 2008년 한국역사문화 골든벨대회(현재 퀴즈대회)를 창립했다.
“평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대회가 없을 까하자당시 교육원장이 인터넷으로 골든벨한국대회를 볼 것을 권했다. 재미가 있었고 어떻게 진행할 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한국학교 행사가 없는12월 초순에 아콜라한국문화학교가주최가 되어 대회를 시작했다. 지금도뉴욕과 뉴저지 등 동북부 지역의 각한국학교 대표 학생들이 출전하여 가슴 두근거리며 퀴즈를 맞추고 패자부활전을 통해 다시 도전하는 등 재미있게 진행되고 있다.”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2세들은 퀴즈게임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쉽게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다.
허낭자는 2008~2009년 재미한국학교 동북부협의회 제12대 회장,2009~2012년 재미한국학교 협의회감사, 2009년부터 현재까지 자문위원이다. 한국국민교육 국무총리 표창에이어 올 10월 한국교육부로부터 뉴저지 주에서 한국어 및 한국문화교육에힘써온 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독문학 전공자가 재정전문가로
허낭자는 1944년 아버지의 직장이있던 중국 대련에서 태어나 세 살에평북 신의주, 안성을 거쳐 서울에 정착하면서 수도여고와 이화여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5대 기독교집안에서 성장하며 신학을 공부한 어머니의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학 졸업후 학교 조교생활을 3년간 한 후 1971년 도미했다.
“독일 유학을 가려했으나 고장로와결혼하면서 미국에서 신혼생활을 보냈다. 차파쿼아 지역에 살면서 유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맨하탄 뉴욕한인교회에 출석했고 성가대 활동을 했다. ”그가‘ 고장로’라 부르는 남편 고근택씨는 한양공대 공학도 출신으로 미국유수의 직장( 현재 프루덴셜 보험)에다녔고 이후 커네티컷 리지필드 지역에서 대형 세탁소를 열었다.
허낭자는 1971년 뉴욕에 온 지 6개월만에 공개시험으로 입사한 AT&T에서 한창 재정분석가로 잘 나가던 80년대 중반, 세탁소 개업 3년 만에 남편에게 질병이 찾아왔다.
“남편이 출장 갔다가 갑자기 복통이 와서 입원을 했다. 맨하탄 슬론캐터링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다행히 췌장암이 아니었다. 간경화로 간이 나빠지고 있었다. 주위에서 간이식을 해도평생 후유증으로 고생한다고들 했다.
식이요법을 배워 음식으로 낫게 하자고 결심했다.”얼굴이 시커멓던 남편은 이상구 박사의 뉴스타트 운동 건강 세미나에 3주 다녀오면서 얼굴빛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그래서 허낭자는 환자의 가족으로써 3주간‘ 채식 식생활 참건강식’세미나를 세 번 씩 갔고 매번 부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요리법을배웠다. 그때마다 회사의 휴가를 사용해야 했다.
간환자 뿐만 아니라 암, 심장병 등등 모든 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식이요법을 배워 온 그는 남편의 식단을책임졌고 병이 완치되자 뉴욕한국일보에 간병기를 게재, 한인사회 초청 강사로써 여러 곳을 다니면서 식이요법을 전파했다. 그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한국학교 학부형 클래스에서 식이요법 강의를 했었다. 남편은 발병이후23년을 건강하게 살다가 7년 전 작고했다.
“풀타임 직장에서 미전역으로 출장도 많이 다녔다. 남편 간호에 아들 셋키우면서 주말에는 한국학교 봉사활동을 하는데 친정 부모님이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어림없었다.”아버지는 손자들이 가는 곳 어디든운전을 해주었고 어머니는 살림을 챙겨주시며 노후를 보내다가 10년 전 두분 모두 별세했다. 현재 장남은 버몬트지역에서 미국 회사에 다니고 쌍둥이인 차남과 삼남은 각각 개인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손자 한명을 두었다.
▲끊임없는 자기개발
허낭자는 AT&T/ 버라이즌을 다니며 퇴근 후에는 웨체스터 페이스 유니버시티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공부했고 MBA 코스를 수료했다. N.Y.U. 스피치 코스 개인 레슨도 받았는데 학비와고액의 레슨비를 모두 직장에서 대주었다.
“입사당시 유일한 한인이었고 나 자신 굉장히 노력했다. 진급시 다른 백인보다 늦어지는 차별도 받았지만 현재의 재정을 분석하여 앞으로 얼마의 예산을 세울지 계획하는 재정분석가로디렉터 자리까지 올라갔으니 22년간근무를 잘 한 것이다. ”그는 AT & T를 그만 둔 지 한 달이되자 심심해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한다. Harsco Corporation 예산담당자로 입사하여 15년을 근무했다. 짜투리시간을 내어 한국전통 매듭을 배웠고2015년 5월 뉴저지 나비박물관에서유운경, 허낭자 작가의 2인전을 할 정도였다. 은퇴 후 일정도 쉴 틈이 없다.
“오는 12월에는 하프 연주회를 하고 1년 후에는 보자기 전시회를 하려한다. 젊은 시절 유학 가려다 못 가본독일에 가서 6개월 정도 살면서 주위유럽 여러나라를 둘러보며 문화와 역사 공부를 하고 싶다 ’ 는 꿈을 이야기한다.
평생을 배우는 자세로 살아오고 있는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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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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