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메릴랜드에 사는 어느 지인이 건네준 H형의 오래된 시집 ‘그대 머무는 곳은’ 을 읽고 이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 한 창작인으로서 그처럼 다양한 색깔의 언어로 자신의 고백을 쏟아내면서도 자신의 작품세계를 다듬기위하여 그토록 많은 번민과 갈등을 겪고 계시는 H형의 문학에 대한 자세에 제 마음이 쏠렸습니다.
“멀쩡한 종이만 버려놨군, 할 수 없지, 돌아보면 어느새 반백년, 남은 시간을 아끼고 사랑해야지... 습작이라는 이름으로 부끄러움을 감추고 그 부끄러움 뒤에 숨겨있는 욕심, 규보나 이백처럼 진정한 명품을 갖고 싶네, 먼 길이야, 진정 먼 길이야.”
H형, 이 세상 창작을 자신의 삶의 최고 가치로 믿고 사는 작가치고 명작에 대한 갈망과 집착이 없는 예술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창작인들이 긍극적으로 이루고자하는 예술적 완성을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며, 또 한편으로는 바로 이러한 희망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창작의 산고를 완화해주는 진통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H형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면서 H형이 지니는 정신적 고통의 무게가 단순히 명작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H형이 가지고 계신 문학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한편으론 H형의 지나친 겸손이 혹시나 스스로 H형을 주위로부터 단절시키고 고립시킬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립은 창작인의 영혼을 시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H형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이 그려진 그 시집의 서문을 읽으면서는 몇번이나 제 마음이 무너짐을 경험했습니다.
“어머니! 언제나 저는 원고지위에 이 말을 쓰고 난 후에는 한동안씩 다음 글들 쓰지 못합니다. 이 세상 어떤 언어도 내 삶에 있어서 이보다 더 많은 의미를 지니는 말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말은 함축된 한편의 시이며 한 토막의 작은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언어 뒤에 떠오르는 많은 사연 때문에 한동안씩 원고지 위에서 미망의 길을 헤맵니다. 스스로 지탱하기 힘든 긴 세월을 등에 지고서 반백이 다된 아들을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걱정하는 여든셋의 내 하얀 어머니!
근심을 천명인양 가슴속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어머니. 그래서, 더욱더 안쓰러운 내 어머니께. “생전에 네가 만든 책 한권 읽고 가게 해주렴.” 삶의 미로를 헤매다가 멀리 떠나던 아들에게 작은 소망으로 눈물을 뒤로 감추시던 그 작은 음성이 가슴에 남아 때때로 마음 아팠던 나날들. 돋보기에 의지하여 이 책을 보실 수 있으시련지…. 말썽 많던 아들 멀리 떠나보내고 언제나 가슴 허전해 하시는 내 어머니께 미련한 단어가 구석구석 튀어나오고 아직도 통제되지 못하는 언어가 행간마다 난무하는 이 시집을 전해드립니다. 서투른 걸음일망정 대견했던 돌날의 아이처럼 인생의 또 한쪽을 향한 이, 뒤뚱거리는 걸음마가 내 어머니께는 그래도 작은 기쁨이 되리니 풍진 세속에의 다른 눈길들이야 내, 어이 돌아볼 마음이 있으랴…”
설령 이 글이 이 시집의 서문으로 쓰여졌다 할지라도 이것은 문학이라는 예술적 장르가 갖는 호소력과, 설득력과, 우리가 아무리 척박한 삶을 살고 있을 때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자식에 대한 애절한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한편의 서사시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제가 있는 버지니아의 산기슭에도 가을이 사뭇 깊어졌습니다. 늘 이맘때가 되면 덧없이 마음이 허전해지곤 합니다. 그럴 때 마다 밤늦도록 수작(酬酌)을 함께하며 이 텅빈 마음을 달래줄 술벗이 한없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부디 이 계절이 다 가기 전 불원간 메릴랜드의 어느 곳에선가 “어이, 나 여기있어!” 라고 소리치며 흔드는 H형의 손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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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명 마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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