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이 깼다. 천양희 시인은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빅토르 위고가 생각나고 발자크, 바흐, 고흐 등등이 생각난다고 했는데, 나는 무슨 영문인지 어제 신은 빨간 구두 생각이 났다. 그 구두를 신을 때면, 누구든지 구두가 예쁘다며 찬사를 보낸다. 어제도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데, 건물 경비원이 큰 목소리로 “구두가 너무 예쁘다!”며 한마디 했다. 그래서, 이젠 너무 오래되어 앞쪽 밑창도 많이 얇아지고 해진 신발을 버리지도 않고 엑센트가 필요한 날엔 그 구두를 신곤 한다. 에나멜 소재의 빨간 구두에 금색 띠가 구두 맨 위와 굽에 엑센트로 들어가, 날씨나 마음이 흐린 날 신으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빨간 구두 생각을 하니, 큰아이 지호가 어렸을 때 유난히도 빨간 구두를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두 살 때부터 빨간 구두를 좋아해 아침마다 빨간 구두를 찾더니, 네 살 땐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가 신은 그 빨간 구두를 사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보석처럼 반짝이면서 신으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그런 마법의 빨간 신발. 처음엔 바쁘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아이의 요구를 피하다가 잊지 않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아이를 대면해야 했다. “도로시는 그 신발을 가게에서 산 게 아니잖아. 도로시가 악한 마귀할멈을 없애고 고통받던 이들을 구해줘서 착한 요정이 와서 선물로 준 거지.”
“그럼 나도 언젠가 많은 사람이 고마워할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요정이 내게 그런 구두를 가져다 줄까요?”라고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었다. 산타클로스와 요정을 믿던 아이에게 착한 일을 할 동기부여도 하고 희망을 열어 놓으려는 마음에 나는 “그럼”이라고 했다. 아이는 그때 그 대화를 기억할까?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이 가득한 마루에서였는데…. 아이에게 때로는 ‘부질없는 듯한, 절망스러운 많은 순간들을 반복해서 이겨낸 후에야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이 나타난다’고, 그때는 덧붙이지 못했다.
그런 순간을 생각하니, 전날 사진에서 본 정현의 벗겨지고 물집 터진 발이 떠올랐다. 요 며칠간은 정말 정현의 테니스 경기를 보며 가슴 벅찼었다. 호주 오픈 랭킹 4위의 독일 선수를 이기고, 테니스를 하는 내 딸의 우상인 조코비치를 단박에 이기고, 8강에서도 미국 선수를 스트레이트 세트로 이긴 후, 준결승에서 테니스의 황제 페더러와 맞붙었다. 내가 좋아하는 페더러지만, 내 자식 같은 정현이 싸우니 정현을 응원할 수밖에. 그의 젊음과 무서운 속도로 차고 올라온 그 힘으로 페더러도 이기고 결승까지 가지 않을까 소망하며.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터진 발의 고통으로 경기를 마치지 못했다. 아직 여린 그의 발은 더 많은 고통의 순간을 이겨 더 단단해져야 하겠구나.
창밖 키 높은 나무들 사이로 어두움 가운데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 조각들이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새벽 다섯 시 사십오분이면 울리는 나의 알람. 그리고 시작되는 또 하루. 때로는 쳇바퀴 도는 듯한 나의 일상이지만, 반복해서 떨어지는 공을 전력을 다해 받아내듯 나 또한 나에게 던져지는 일상을 전력을 다해 감당해내야 한다. 때론 숨이 벅차기도 고통에 주저앉기도 하겠지만, 그런 모든 순간이 나를 더 단단히 설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하늘이 밝아온다. 오늘은 무슨 신발을 신고 하루를 맞이할까?
<송윤정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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