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행기 승무원으로 근무하던 때의 1969년 12월 11일 낮 12시 25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같이 근무하던 동기중에 ‘성경희’가 있었다. 오전 근무 비행으로 강릉에 갔다. 비행기가 돌아올 시간인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가끔 날씨 관계와 비행기 고장으로 도착시간이 늦어질 때는 있었다. 그렇지만 강릉으로 출발한 비행기는 연락이 두절이 되면서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다음에 정해진 비행시간들이 엉망이 되었다. 급한 행사의 약속과 비즈니스하는 손님들이 화가 많이 나 있었다. 한참 후에야 여승무원 담당 객실 부장이 얼굴이 백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면서 승무원실로 들어왔다. 강릉 비행기가 이북으로 납치되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국제선의 비행기가 아닌 YS11 소형 비행기이었다. 승객과 승무원 모두 50명만이 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북으로 납치된 여승무원 2사람과 조종사 부조종사 2명, 보안관 1명 모두가 5사람이었다.
그 때 국내선의 여승무원은 1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2명이 탑승했던 이유는 서로가 고등학교 동기로 절친한 친구였었다. 강릉으로 가는 여승무원이 브리핑 끝나고 비행기를 향해서 가는 길이었다. 부산에서 오버나잇 한 비행기가 돌아왔다. 부산에서 돌아온 여승무원 정경숙과 강릉가는 여승무원 성경희는 서로 복도에서 마주쳤다. 두 여승무원은 서로 반가운 마음이었다.
강릉가는 여승무원이 함께 비행할 것을 권했다. 두사람은 쾌히 서로가 마음이 일치가 되었다. 비행기가 납치되던 본인의 스케줄은 스텐바이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들어온 객실부장은 어쩔줄 몰라 동분서주했다.
그 후로의 소식은 비행기 손님 39명은 돌아오고 여승무원 2사람과 기장 부기장 2사람, 손님 7사람 모두 11명이 현재까지 못 돌아오고 있다. 또 2명의 여승무원은 대남 방송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때의 비행납치의 사건은 지금까지 가족과 친지들, 친구들 우리나라에게 가슴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그 다음해의 1970년도의 일이다. 또 한건의 강릉행 비행기 납북 소식이 전해졌다. 비행기의 이름은 F27이며 51명의 좌석이다. 1년도 안되어서 납북된 것이다. 납북된 비행기는 거의 강릉에 도착할 무렵에 수상한 청년이 갑자기 수류탄을 뽑아들고 이북으로 향하라는 고함소리로 분위기를 살벌케했다 한다. 괴한에게 이북으로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순식간에 보안관이 괴한의 등을 덥쳤다고 한다.
괴한의 가슴에 수류탄이 터지면서 괴한은 즉사하며 앞쪽의 부기장이 있는 쪽이 폭파가 되면서 부 조종사는 목숨을 잃고 여승무원 최석자는 넘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졌다고 한다. 다행히도 승객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었다. 사고가 난후 대한항공 본사와 서울 정부에서의 도움으로 병원치료와 안전을 도와서 보금자리로 모두 돌아갔다. 비행기를 강릉에 넘어가지 않게 하고 보안을 잘 했다고 많은 상금과 박정희 대통령의 ‘5.16 민족상’ 과 ‘삼일 보국 훈장’을 5명이 모두 받았다고 한다.
훌륭하게 지켜낸 여승무원에게 휴양겸 세계 일주 여행을 시켜주신 사장님께 감사의 뜻을 전했다. 우리 승무원들은 비행기의 스케줄이 강릉과 속초로 정해지면 늘 긴장과 불안에 떨면서 비행을 한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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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자 수필가,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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