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90을 바라보지만 7월 27일만 다가오면 가슴이 뛴다. 나는 6.25 동란 3년, 월남전 2년 그리고 캄보디아 1년, 젊디젊은 시절 6년을 전쟁터에서 보낸 사람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군이든 적군이든 젊은 병사들의 소원이었다. 전투는 상황에 따라, 이기기도 하고 패하기도 하지만 같은 포로라도 월남전에서는 포로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고시에 합격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들 하였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을 앞두고 남과 북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전선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후방에서는 고향 떠난 피난민들이 굶주림 속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휴전소식을 듣고 있었다.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1953년 7월27일 휴전이 협정되었다.
휴전이 이루어지고 인민군 포로의 북송이 결정되었다. 인민군 북송포로 환송은 1953년 8월 서부전선의 잡초가 우거져 황량한 넓은 벌판에, 녹슬은 기찻길 조그마한 건널목에서 30분 정도 이루어졌다.
참가자는 유엔군 소속 미군 5-6명과 작은 규모의 미군 군악대 그리고 내가 소속해 있는 한국 육군 군악대가 좌우로 나란히 서서 행진곡과 민요 아리랑 행진곡을 연주하며 기다리고 있는 중 인민군 북송열차가 도착하였다.
그 기차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뛰고 있었다. 북송열차는 30분 정도 정차 후 기적소리를 울리며 우리 민족의 아픔을 싣고 떠나가고 있었다. 포로들은 “인민 공화국 만세 만세!”를 외치며 유리창과 철망을 깨고 부순 뒤 옷을 찢어 벗어 밖으로 던지더니 맨몸으로 엉키어 축제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이 부르는 인민군 만세 소리와 우리 군악대의 연주는 서로 엉키어 넓은 벌판으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으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어서 고향을 돌아가는 자는 가문의 영광이고 영웅대접을 받지만 살아서 가슴에 많은 이야기를 안고 가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돌아가는 그 곳에 나의 그리운 어머니와 형제가 있으매 내 마음은 그들과 함께 그 열차를 타고 있었다. “나도 너희들과 같이 고향에 가고 싶다. 너희들이 가는 그 곳에는 내 어머니가 계시고 나의 형제들도 있는 곳이다. 어머니 나는 못가요. 어머니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세요”를 되뇌며 눈물을 닦았다.
기차가 멀리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리랑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아리랑을 연주한 지도 67년이 흘렀는데 이산가족의 아픔은 내 가슴에 아직도 남아 있다. 7월27일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내 마음에 낙인이 찍힌 날이다. 이산가족을 가진 우리 마음은 아직도 아프다.
<
장 송 / 센터빌, VA>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