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이 낀 4월의 아침이다. 밖이 잘 보이지 않아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고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은 어떤 환자들을 만날까 머릿속에 그려본다. 병원 앞에 도착하니 벌써 구급차 두 대가 서있다. ‘아침부터 바쁘겠군’ 중얼거리면 응급실 내 방으로 들어간다.”
어느 후배 정신과의사의 임상 블로그에 실린 글이다. 나 자신을 오버랩 시키는 글이다. 대형 정신병원 응급실 정신과의사로 마음의 뼈가 굳어버린 나는 이제 은퇴 3년차이다. “그래,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오래 전 초봄 안개 낀 어느 날의 임상기록을 들춰본다.
“뱃살이 너무 나와 내가 싫었어요. 죽으려고 한 것은 절대 아니에요.” 왜 약물을 과다 복용했느냐는 물음에 항의조로 답하는 환자는 4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둘째가 10살이 넘어 이제 좀 편히 살아야겠다고 했는데 예기치 않은 임신을 했다.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아기가 정상으로 태어날까, 직장 일은 어떻게 할까, 아이가 중학교 입학할 때면 나는 50대 후반이 되는데 등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이었다.
환자는 40이 넘자 부작용 때문에 피임약을 끊었다. 대신 피임방법을 책임지겠다고 한 남편이 미웠다. 출산이 다가오자 고령 임신이라 산후중독증 위험이 있고, 혹시 회음 절개술이나 제왕절개술이 필요할지 모르니 서류에 서명해달라는 의사의 요청도 있어 마음이 무거웠다. 다행히 태어난 아기는 건강한 정상아였고, 출산 후 아기와 산모에 큰 문제가 없어 곧 퇴원했다.
그런데 몸이 문제였다. 분만 시 회음부 절개술을 한 부위가 잘 아물지 않고 계속 아프고 불편했고 무엇보다 임신 중 늘어난 체중이 쉽게 줄어들지 않아 뱃살이 불룩 나와 있었다. 호르몬 변화와 여러 스트레스는 산모에게 정신적, 신체적 질환에 걸릴 위험을 높여준다. 고령임신, 고령출산의 경우는 더하다. 출산 후 1-2주 사이에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산후우울감은 80%의 산모들이 경험하는 정상적 감정상태이다. 그런데 임신 전, 임신 중, 출산 후에 불안감, 우울감, 무기력감, 피로감, 수면장애 등이 심해지면 주산기 우울증(Perinatal depression)이라 부른다.
과거 정신과의사는 환자와의 신체접촉을 금기시하여 일부러 신체증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늘의 정신과의사는 마음 증상뿐 아니라 몸의 증상도 세세히 관찰한 다음 진단하고 치료를 결정한다. 특히 고령 임산부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눈에 띄게 변화하는 자신의 외모에 몹시 신경을 쓴다. 체중, 피부색, 탈모 등 외모에 대한 고민이 심하다. 더불어 출산 후 요통, 골반통, 치골통, 성교통으로 고생을 한다.
앞의 환자는 튀어나온 뱃살을 줄이려고 밥도 적게 먹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했다. 그러나 체중은 안 빠지고 얼굴에 낀 기미도 잘 없어지지 않았다. 남편이 또 미워졌다. 동시에 남편에게 버림받을까 심히 불안하고 잠도 설쳤다. 급기야 자신에게서 여자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정신과의사를 만나 보라는 산부인과 의사한테 먼저 진정제 처방을 부탁했다. 어느 날 진정제를 너무 많이 복용해 병원으로 온 것이었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에게 기대와 책임에 대한 두려움, 몸과 마음에 엄청난 변화를 준다. 35세 넘은 고령 출산의 경우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고, 감정기복도 심해진다. 더불어 여러 신체중상과 외모 변화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각하다. 경력단절에 대한 사회적 고민에 휩싸일 수도 있고 남편의 나이가 중년위기 발생 시기와 맞물려 혹시 자기 곁을 떠날까 하는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앞 환자와 같은 경우, 효과적인 치유를 위해서는 산부인과 전문의, 통증 전문의와 잘 협조하여 신체적 증상을 먼저 줄여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임신과 출산 후에 발생하는 신체적 문제는 불안증, 우울증 못지않게 잘 도와주어야 하는 게 정신과의사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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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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