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계 정신분석학자로 유명한 빅토로 프랑클이라는 분이 나치스 강제 수용소에 잡혀 있었을 때 경험했던 일이다. 그때의 수용소 생활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참담한 때였고 내일 아침이라도 당장 가스실로 보내면 이 세상과 하직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수용소는 매일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찬 저녁을 보냈는데, 어느 날 저녁이었다. 함께 갇혀 있는 노인이 일어나서 창살을 붙들고 저 멀리 보이는 저녁 하늘을 보면서 감탄하더라는 것이다. “아, 석양 하늘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그 노인의 얼굴은 내일 아침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의 얼굴의 아니었다.
빅토르 프랑크는 그때 노인의 감탄사와 얼굴표정을 보며 너무나 큰 감동과 깨달음을 얻었다고 술회했다. 내일 죽어도 오늘 감사한다는 말은 대부분 수사(修辭)로 끝나는 경우겠지만 그러나 그 말이 진정성을 담는 일도 아주 없지 않다는 증거를 그 노인이 보여준 셈이다.
왜 우리에겐 감사절이 있어야하는가. 어쩌면 일 년 중 하루라도 날을 잡아 수용소의 노인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여건 속에서 석양의 아름다움을 보며 감탄하는 것과 같은 여유를 가져보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나이에 비례해 이상스러울 만치 협량(狹量)해진다. 삶의 두께가 점점 쌓이면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가진 것에 대한 감사가 있을 법한데 돌아보면 감사가 너무나 빈약하다.
석양을 보고 감탄하기는커녕 하루해가 스러지는 데 대하여 화가 잔뜩 난 얼굴이 아닌가. 거울에 비춰진 얼굴을 보아도 공연한 심술이 묻어있음을 감추지 못한다. 정말 왜 그런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단체나 모임에서도 다투고 싸우고 고함을 지르는 얼굴들을 보면 청춘보다는 황혼 쪽으로 걸어가는 얼굴들이 더 많다.
세월을 살만치 살았으면 상당부분 감사하는 정서가 스며있어야 하건만 별이고 달이고 태양이고 다 시들하다는 표정이다. 바로 불치의 노인병 증세다. 물론 감사의 공치사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노인이 되면 연극을 잘한다. 산전수전에 익숙해서인지 제법 감사를 입에 달고 살줄도 알고 별 것 아닌 대접을 받고도 감사를 남발하는 장면도 쉽게 눈에 띈다. 그러나 감사절이란 그런 가면을 벗고 감사의 진정성을 가져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생각을 한다. 그것은 “불행 중 다행”의식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정말 많은 인생이었다. 평생 하나의 얼굴을 갖고 사는 것도 불행 중 다행이다.
뿐만이 아니다. 나는 사실 내 놓을 것도 별로 없고 실력도 없다. 대단한 이력도, 눈에 확 들어올 만큼 재력도 없다. 그런데도 안식을 취할 가정이 있고 잘 자란 자식들이 있으니 정말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삶의 궤적을 그려주신 그분, 하나님이 내게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란 정녕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불행 중 다행한 또 하나의 일은 추억이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떠오르는 추억, 벌써 아득한 옛일이건만 가슴이 뛰는 추억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추억보다 더 짙은 추억은 슬픈 추억이다. 노인의 가슴을 아련히 젖게 만드는 추억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그 시절 그때의 노래를 듣다보면 어느새 몇 개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안암동 명동 광화문 수유리에 내리는 빗줄기를 지금도 맞는다. 그래서 감사하다. 나를 생각하고 확인하는 가슴이 아직 존재한다는 일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잔잔한 축복이며 은혜다. 그래서 노인을 이기지 못하는 추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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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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