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르익으면 즐겨 찾는 곳이 있다. 오렌지카운티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반을 달리니 샌버나디노 오크 글렌(Oak Glen) 사인이 보였다. 울퉁불퉁한 바위 산맥이 감싸 안은 산기슭을 따라 아담한 동네가 펼쳐진다. 바로 Riley’s 사과 농장이다. 차가워진 기운으로 물든 단풍이 곱다. 시린 뺨과 피부 온도와는 달리 따스한 움직임이 안으로 파고든다. 파르르 떨리는 사시나무 사이로 은빛 물결이 인다.
싸늘한 바람에 주먹만 한 알갱이들이 붉은빛으로 흔들린다. 가을 나들이 나온 가족들에게 사과 농장을 개방하여 여러 가지 체험을 맛보게 한다. 한입 깨물었을 때 아삭거리는 느낌이 싱그럽다. 사과 따기, 애플 사이다, 애플파이, 애플 도넛을 시식하면서 가을을 맛본다.
곁에 마련된 염소, 조랑말, 타조, 가축들을 만지며 좋아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해맑다. 다람쥐와 사슴이 뛰어나올 것 같은 Children’s Forest 길도 총총히 옮기는 발걸음으로 분주하다. 호박, 옥수수밭 사이에 앉아 사진을 찍고, 마차에 올라 동네를 돌며 말굽 소리에 맞춰 흥얼거리는 가족도 있다.
누렇게 물든 나뭇잎 깔린 골짜기를 걸으며 가을을 숨 쉬었다. 그런데 간간이 검게 그을린 나무들이 눈에 띈다. 전에 보지 못하던 풍경이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한때 푸르던 가지는 녹아내린 선처럼 굽었다. 껍질은 거칠게 갈라져 있고, 표면은 시커멓게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다. 어떤 나무는 팔과 목이 잘리고 옆구리가 동강 난 채 누워있다. 아픈 시간을 품고 있는 듯하다.
몇 년 전 산불로 인해 이 지역이 피해를 보았다. 사라진 나무와 집 사이에서 다행히 농장은 불을 피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는 게다. 화마가 할퀴고 간 뒷모습이 크게 다가왔다. 심지어 사과나무 가지에 달린 열매들이 검게 보이는 건 왜일까?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서 잿빛 나무를 바라본다. 몸통 단단한 옹이 속은 불길이 스쳐 간 회색빛 재로 덮여 있다. 손끝이 닿으면 바스러질 것 같고, 숯 냄새가 진하게 스며 나오는 듯하다. 그 속에 미약한 열기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이 불면 가벼운 재가 흩날리며, 그 속에서 타다 남은 생의 잔향이 조용히 흩어져 나오지 않겠는가. 희끄무레한 노년의 남은 생이 그 나무를 닮은 건 아닐는지 생각에 잠겨본다.
나무는 여전히 그 불을 기억하는 듯 침묵 속에 서 있다. 타버렸지만 쓰러지지 않고, 어둠 속에서 새로운 빛을 기다리는 듯하다. 회생할 수 있을까? 그을린 자리에서 다시 싹이 피어나겠지. 가지 끝에 생명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오름의 끝에서 소멸이 아닌 시작이 태어난다. 재로부터 새 생명이 피어난다는 바람으로 늦가을 산을 거뜬히 걸을 수 있었다. 뜨거웠던 열정으로 피었던 젊음을 지나 사라진 시간을 견뎌온 늙은 나무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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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숙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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