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당시 일선지휘관 예비역장성 4명 한자리에
"반세기가 흘렀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일념만으로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바쳤던 동료, 부하들의 비장한 모습을 한시도 잊은적이 없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을 앞둔 노병들의 가슴엔 총탄을 안고 산화한 젊은이들의 외마디 소리가 더욱 올올이 박히고 있다. 당시 대위와 소령, 중령등 일선 전장을 누비다가 지금은 모두 70이 넘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LA의 노병들. 그들에게 6·25는 더 이상 ‘잊혀진 전쟁’이 아니다.
지난 6일 한자리에 모인 미국내 최고 원로인 이동화 장군(76·중장 예편), 35사단장, 육본인사참모부장등을 거친 손희선 장군(76·소장예편), 6·25당시 헌병장교로 각종 전투를 치르고 헌병감을 지낸 김득모 장군(78·준장예편), 그리고 남가주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오윤영 장군(74·준장 예편)등 노병들은 "아직도 전장의 참혹한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며 "결코 6·25가 잊혀진 전쟁이 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동화 장군은 "46년 임관한 육사 2기 동기 194명중 6·25전쟁 동안 33명이 전사하고 행방불명되거나 실종된 사람이 26명이었다"며 "소령, 중령급 피해가 이정도 였으니 사병과 소위, 중위들은 말그대로 총알받이의 하루살이 인생이었다"며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설명했다.
"6·25전쟁시 기본 개인화기도 부족한 상태에서 특별한 작전이란게 없었다"고 전한 손희선 장군은 "수류탄으로 탱크를 부수라는 명령을 기꺼히 수용, 장렬하게 전사한 부하들을 생각하면 살아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라며 끝내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김득모 장군은 "세월이 갈수록 6·25가 점점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남편을 잃은 미망인, 아들을 잃은 부모등 아직도 고생하고 있는 전몰장병들의 유가족들에 대해 이번 50주년을 계기로 국가와 국민이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6·25가 터진후 1사단 수색 중대장으로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하면서 중상을 당하기도 한 오 장군은 군이 수여하는 5개 훈장중 을지, 충무, 화랑, 인현등 4개의 주요 훈장을 모두 받은 장본인. 오 장군은 "목숨을 국가에 잡혔다고 생각하니 겁도 나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들 4장군이 받은 각종 훈장을 합치면 40개가 넘는다. 이동화 장군, 김득모 장군, 손희선 장군은 육사 2기 동기이며 오장군은 육사 특 8기로 군에 입대했다.
노병들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한국인의 한사람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한국이 자주국방의 기틀아래 강군을 유지했기 때문에 경제발전도 있었고 북한도 협상테이블로 나온 것"이라며 "더이상 민족이 총을 겨누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남은 인생을 전쟁의 참흑성과 동족 상잔의 뼈아픈 교훈을 일깨워주는데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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