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영화는 일종의 기호학 교과서이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의 이름, 의상과 무대 세트의 색상 등 그의 영화는 다양한 함의의 전시장이었으며 그것을 해독하는 것은 즐거움이었으나, 일부 식자층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감독으로서 그는 그다지 친절한 편은 아니다.
1995년 제작됐으나 국내에 수입돼 두 번 심의가 반려됐던 ‘필로우 북(The Pillow Book)’ 이 12월 2일 개봉된다.
빈번한 전라장면에 사람의 가죽을 벗겨내 책을 만드는 엽기적인 요소까지, ‘필로우 북’ 역시 이전 영화들처럼 충격과 혼란을 제공하며 동시에 그것을 즐길 수 없게 하는 불편한 장치를 곳곳에 숨기고 있다.
’필로우 북’이란 일본의 헤이안 시대의 궁녀였던 세이 쇼나곤이 황실의 의식과 애정행각을 13편의 시에 소상히 기록한 일기첩으로 일본 문학사의 걸작으로 꼽힌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소니사의 HDTV 기술을 동원, 이 책의 내용을 들으며 자란 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남자와 여자의 사랑, 글자에 대한 인간의 강박적 애정을 현란한 영상으로 풀어내고 있다. 화면 안에 화면이 나타나고, 화면에는 끊임없이 서예 글자가 씌어진다. 관객은 내러티브에 빠져들기 보다는 끊임없이 화면의 의미를 해독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일본에 한 소녀가 있었다. 서예가인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의 생일 마다 얼굴에 이름을 써주었다. 그리고 조물주가 그러했듯 작품을 완성하고 난 뒤 사인을 해넣었다. 소녀의 생일마다 아버지는 출판업자를 찾아 몸을 바쳤고, 그 대가로 책을 출판했다.
아버지의 매춘장면을 목격한, 그러나 그것이 갖는 의미를 몰랐던 나키코(비비안 우)는 불행한 결혼을 청산하고 홍콩으로 이주해 모델로 성공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그랬듯 자신의 얼굴에 글을 써줄 남자를 찾아 헤맨다.
번역가 제롬(이완 맥그리거)를 만나 "종이가 아닌 붓이 되어보라"는 말을 들은 그녀는 그때부터 방황, 순수, 백치, 무기력, 유혹, 젊음 등을 주제로 글을 써 나가게 된다. 서예가 글을 쓰는 기술이 아닌 조형 예술 그 자체이듯, 영화에서 서예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영화적 행위로 드러난다.
글이 씌어지는 행위에 만족하던 그녀의 욕망은 글을 쓰는 행위로, 그것을 출판하려는 욕망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 소유욕으로 변질하는 것과 같은 경로이다.
제롬을 사랑했던 출판업자가 그의 시체를 관에서 끄집어 내 살갗을 벗겨 책을 완성하는 장면에서 주제는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이전 영화들처럼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이나, 선명한 이야기 구조와 더욱 쇼킹한 장면이 지루함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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